사설·칼럼

[노주석 칼럼] 태릉골프장을 위한 변명

노주석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8.19 18:05

수정 2020.08.19 18:05

골프장보다 왕릉이 문제
회복 예산 5130억원 허공
유네스코 유산 취소 사유
[노주석 칼럼] 태릉골프장을 위한 변명
부동산 시국이다. 최근 '부동산 내로남불' 형태를 비꼰 풍자 포스터를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스타강사로 등장한 '반포'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은 "순간의 선택이 1.9억 원을 좌우합니다"라고 소신 있게 설명했다. '떡상'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제가 전부 다 더 올려드린다니까요"라고 흥을 돋우고, '집택' 김조원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청와대가 밥 먹여주나요"라고 당당하게 맞섰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천박한 도시 서울에서 이제는 눈을 돌리셔야 합니다"라고 소신을 펼쳤다.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정부는 들끓는 부동산 민심을 돌리려고 '8·4 공급대책'을 내놓았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한 군 골프장인 태릉골프장이 직격탄을 맞았다. 정책입안 당국자나 부동산 전문가들은 54년 역사의 유수 골프장을 갈아엎고 1만여가구가 사는 35층짜리 초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경우의 수지타산을 따지느라 바쁘다. 골프장이 차지한 부지와 용도변경에만 신경을 쏟을 뿐 이 골프장을 낳은 지역의 역사와 지명의 유래에는 눈을 감고 있다.

우리가 흔히 태릉이라고 통칭하는 두 개의 왕릉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조선의 13대 왕 명종 부부가 묻힌 강릉(康陵)과 어머니 문정왕후가 묻힌 태릉(泰陵)의 존재는 잊고 있다. 태릉과 강릉은 지난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이다. 두 왕릉은 태릉골프장과 왕복 6차선 화랑로를 사이에 두고 있다. 봉분을 기준으로 500m쯤 거리다. 태릉과 강릉의 봉분 정남향을 향해 들어서는 초고층 아파트 단지가 왕릉을 병풍처럼 가리게 될 것이다.

왕릉의 경관이 망가질 게 뻔한데도 전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나 문화재청은 꿀 먹은 벙어리다. 두 왕릉에 미칠 경관훼손과 왕릉관리에 미칠 악영향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예비역 군 장성 모임인 성우회와 노원구를 지역구로 둔 여당 의원 3명과 구청장이 반대의 목소리를 냈을 뿐이다.

그동안 육군사관학교와 태릉골프장 그리고 태릉선수촌과 태릉사격장이 왕릉 영역을 좀 먹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이후 체육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조선왕릉 원형회복을 꾀했다. 태릉선수촌을 충북 진천으로 옮기는 등의 비용으로 혈세 5130억원을 썼다. 결과적으로 돈을 허공에다 뿌린 셈이다. 앞뒤도, 물불도 가리지 않는 포퓰리즘 정책이 낳은 비극이다. 왕릉회복은 고사하고 왕릉을 포위한 초고층 아파트가 왕릉을 짓누를 날만 남았다.

조선왕릉 40기 중 30%에 달하는 12기의 조선왕릉이 각종 개발압력에 직면해 있다고 한다. 이는 유네스코의 조선왕릉 원형회복 권고에도 역행한다. 유네스코 측이 위기에 처한 사실을 알게 되면 문화유산 등재 취소에 나설지도 모를 일이다. 태릉골프장 코스 시작점 부근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로 새겨진 '나라와 함께 겨레와 함께'라는 푯돌이 있다.
클럽하우스 2층에는 '넉넉하고 아름다운 터에서 한시름을 털고 갑니다'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2003년도 방명록과 박정희 대통령의 1966년도 개장 기념 시타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서울은 오래됐지만 흔적의 도시다.
몇 남지 않은 소중한 기억과 기록을 지우고 르 코르뷔지에의 '거주기계'가 지배하는 '공화국'을 만들려는 까닭을 모르겠다. '천박한 도시'의 저주에 빠진 태릉골프장을 구할 묘수는 없을까.

joo@fnnews.com 노주석 에디터 정치 경제 사회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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