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월드리포트

[재팬 톡] '20세기형 상자도시'의 종언

조은효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8.25 18:14

수정 2020.08.25 18:14

[재팬 톡] '20세기형 상자도시'의 종언
일본 슈퍼마켓에서 묶음판매용 푸딩은 3개가 기본 세트다.

각종 유제품을 대개 4개씩 묶어서 파는데 왜 푸딩만 3개일까. 이유는 "아빠는 안 먹으니까"다.

지금과 달리 4인 가족이 대세였던 과거 1970~1980년대 고도성장기, 아빠들은 푸딩을 먹을 시간에 집에 없었다. 종신고용을 대가로 늦은 밤까지 회사에 충성을 했다. 아빠는 안 먹는 게 아니라 먹을 시간에 집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껏 남아있는 고도성장기의 추억, 일본 아버지들의 희생의 상징이 여전히 일본 슈퍼마켓에 남아있는 것이다.


쇼와시대(1989년 막을 내림)의 유물인 종신고용은 일본에서 적지 않게 도전받았다. 일본 경영자들은 노동유연성을 갈구하면서도 고용유지가 곧 경영자의 미덕이라는 사회 공기에 대체로 순응했다. 그것이 버블 붕괴 이후 일본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었는지 모른다. 물론 정규직을 지키기 위한 희생의 산물도 상당했다. 파견직, 비정규직의 양산이다. 오죽하면 '파견의 품격'이란 드라마가 나왔을까.

그럼에도 일본의 고용유지 관행은 대체로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 칼바람이 불었던 한국과 적지 않게 대비되는 부분이다. 2000년대 초반, 일본 친구가 일본의 무역회사와 도쿄의 한국계 은행 두 곳에 합격했다고 했다. 그 시절 한국 시중은행들은 감원 바람이 수시로 불어닥쳤던 때라 "한국에서 은행은 언제 잘릴지 모르는 곳"이라고 친구에게 겁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최근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겐고 구마(도쿄대 교수)는 "20세기형 상자도시에 종언이 올 것"이라고 했다. 코로나19 감염 확산 사태를 계기로 효율성을 제1의 가치로, 사람들을 거대한 상자(건물) 속으로 몰아넣었던 지금까지의 회사와 그 회사의 집합체인 도시의 모습이 바뀔 것이란 얘기다. 누군가는 회사는 '사회적 군대'라고 하지 않았던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단면이다. 후지쓰, 히타치 등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들은 코로나 사태가 종식돼도 재택근무를 원칙으로 할 작정이다. 보수적이기로 손꼽히는 일본 기업이 앞다퉈 재택근무를 검토하고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상자 속에서' 함께 모여 일해온 지금까지의 방식보다 일견 재택근무가 더 나은 효율성을 낳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비싼 임대료 등 사무실 유지비용이 줄고, 잔업수당도 감소할 것이란 단순한 계산이 나온다. 발빠른 기업들은 출퇴근 교통비 지원도 없앴다. 나아가 이 기회에 경영자들의 비원인 고용유연성을 확보하고, 외주화를 가속화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일본 직장인들이 내심 불안해하는 이유다. 거대한 상자 속에서는 말뜻, 분위기 등 비언어적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업무 외의 '손타쿠'(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한 아첨) 등 사내정치도 가능했으나 이제는 성과로 모든 게 평가된다. '회사로부터 성과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고용유지에 대한 불안이 가장 커 보인다.
특히 대체 가능한 일반사무직이 첫 타깃이 될 것이란 관측도 있다.

출퇴근 지옥철에서 탈출, 가족과 푸딩을 즐길 수 있게 됐지만, 재택근무의 대가가 아직 또렷하게 드러나지 않아 더 불안한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기업들은 또 다른 형태의 효율을 찾아낼 것이며, 일본 직장인들은 이미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이다.

ehcho@fnnews.com 조은효 도쿄특파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