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최진숙 칼럼] 벨라루스의 목소리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9.02 18:05

수정 2020.09.03 18:03

26년 독재저지 비로소 봉기
작가·연주자가 시위 전면에
혁명 성공은 러시아가 변수
[최진숙 칼럼] 벨라루스의 목소리
"그래서 나는 더더욱 이 일을 멈출 수 없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벨라루스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자(2015년)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72). 대표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에서 그는 반복적으로 이 표현을 썼다. 기자 시절에 쓴 반정부 글로 인해 해외를 전전하다 고국으로 돌아와 정착한 게 10년 정도 된다.

'하얀 루시'라는 뜻의 벨라루스는 러시아, 우크라이나와 역사를 공유한다. 모스크바공항 출구엔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세 나라가 한묶음으로 있다. 나머지 구소련과 외국인이 각각 다른 창구다.
같은 형제국이긴 하나 우크라이나와 달리 벨라루스는 러시아에 별다른 적대감이 없다. 하지만 구소련 아래 청년기를 보낸 많은 이들은 지금도 전쟁의 기억을 잘 쫓아내지 못한다. 알렉시예비치도 마찬가지다.

구소련 전역을 돌며 2차대전 참전 여성들을 찾아 새로 쓴 전쟁 역사서가 그 책 '전쟁은…'이다. 기존의 수많은 전쟁서적과 다른 것은 '목소리의 기록'이라는 사실. 전쟁터 사람들 이야기이긴 하나 그의 표현대로 "감정의 역사"다. "구체적인 시간 속에 살고 구체적인 사건을 겪은 구체적인 사람을 연구하면서, 영원의 떨림을 기록했다"고 고백했다. 이를 통해 닿고자 한 것은 전쟁의 진실일 것이다.

또 다른 역작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재앙이 평범한 이들의 삶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증언한다. 그날 밤 당직자였던 소방대원, 긴급 작업 호출로 밥 먹다 불려나간 기계공, 하루아침에 살던 곳에서 사라져야 했던 수많은 체르노빌레츠에 대한 기억이 들어있다. 그렇게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소박한 이들의 "목소리를 읽는 것"이 알렉시예비치의 주된 일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 스스로 역사의 한복판으로 걸어나왔다. 듣고 읽는 것이 아닌 '참전'이다. 26년 집권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 퇴진시위를 이끄는 지도부에 몸을 담았다. 외신은 정치권과 항상 멀리 있으려 했던 알렉시예비치가 이런 결단을 한 걸 볼 때 벨라루스는 이제 혁명의 길로 가게 됐다는 논평을 했다.

지난달 6일 치러진 대선에서 루카셴코가 80% 득표율로 6선에 성공하자 명백히 부정선거라고 외친 이들의 대규모 시위는 이제 주말마다 이어지고 있다. 인구 950만명인 나라에서 10만명씩 거리로 쏟아져나온다. 손에는 꽃과 깃발을 들었다. 루카셴코는 갖은 기행에도 구소련 국가들과 비교해 무난한 분배와 성장을 일궜다는 평도 있었다. 기나긴 독재를 받쳐준 기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온순한 국민들의 순종도 시한이 있다는 걸 그만 몰랐다.

시위대 지도부의 면면은 어쩌면 낯설다. 고령의 알렉시예비치가 조언자 역할이라면, 시위를 전면 주도하는 이는 플루트 전공자 30대 마리아 콜레스니코바다. 금발의 커트머리로 맨앞에 서서 "누를수록 강해질 것"이라고 외친다. 다른 주요 인사들은 투옥됐거나 망명했거나 둘 중 하나다. 비로소 터진 민중봉기의 끝은 지금 알 수가 없다. 집권기 의도적으로 러시아와 거리를 두고자 했던 루카셴코는 이제 푸틴 대통령 발 앞에 엎드려 있다. 정적 나발니 독극물 살해 미수사건으로 머리가 복잡한 푸틴은 이 가련한 독재자에게 염려 말라 위로하면서도 아직은 깊숙한 개입을 꺼리는 것도 같다. 변수는 결국 러시아다.

결말이 그저 이러하길 바란다. 알렉시예비치가 '전쟁은…'에서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다'편에 쓴 구절이다.
"바로 이거야! 세상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을 찾은 것이다.
사실 찾을 줄 알고 있었다."

최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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