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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서] "삼성이니까…" 또다른 차별

안승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9.17 18:15

수정 2020.09.17 18:15

[여의도에서] "삼성이니까…" 또다른 차별
얼마 전 큰 태풍이 지나갔다. 이런 재난이 휩쓸고 가면 재계 여기저기서 수해성금 등의 명목으로 많은 기업들이 기부금을 쾌척한다.

재계를 오래 담당하다 보면 이런 과정에서 관습처럼 반복되는 역학관계를 보게 되는데, 어느 기업이 얼마나 내느냐에 대한 순위다. 우리나라에선 대개 '삼성'이 기준점이다. 삼성이 가장 먼저 나서면 뒤이어 다른 기업들이 뒤따르는데 묘하게 순서와 기부금 규모가 나름 질서정연하게 이어진다.

보통 이런 내용들도 기사화되기 마련인데 "그래서 얼마나 기부하나요?"라고 물어보면 "삼성은 얼마나 한답니까?"라는 질문이 되돌아오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에서 삼성은 어쨌든 특별한 존재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유독 더 주목을 받거나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재계 한 기업의 임원과 점심 자리에서 오너의 후계구도 이야기가 나왔다. 해당 기업 오너의 아들은 이미 한참 전부터 차근차근 경영수업을 받으며 일찌감치 후계자로 낙점된 상태였다. 오너 일가에서 경영을 세습하는 형태에 대해 사회적으로 부정적 인식이 강해지는 터라 이에 대한 부담은 없는지 묻자 "별문제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워낙 일찌감치 후계구도가 정해졌기 때문에 사내에서도 총수 아들이 회사를 물려받는 것을 모두 당연시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이를 삼성으로 치환해놓고 얘기하면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5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제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단순한 문장이었지만 지난 수십년간 재계 총수 중에 이 같은 얘기를 공식 석상에서 꺼낸 것은 아마 이 부회장이 처음일 것이다.

재계 10대 그룹을 놓고 보면 총수 일가에서 기업을 승계하지 않은 곳이 없다. 오너 일가에서 최고경영자 자리와 기업의 소유권을 세습하는 우리나라 기업 형태에 대해선 여전히 논란이 많지만, 한편에선 이런 승계방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것도 사실이다.

민간기업일 뿐인 삼성의 오너가 국민에게 그런 약속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난센스이지만 "역시 삼성이니까" 라고 생각하면 또 받아들여지는 게 현실이다.

"에이, 삼성하고 저희가 같나요"라는 말은 재계에서 심심치 않게 쓰이는 관용구다. 삼성이 하면 큰일이지만, 우리는 해도 된다거나, 우리한테는 별문제가 안되지만 삼성에는 큰 문제가 되는 게 당연하다는 뜻을 깔고 있는 말이다.

이 부회장이 검찰에 기소를 당하던 날, 검찰은 모든 혐의를 상세히 공개 브리핑했다. 며칠 뒤에는 공소장 전문이 한 매체에 공개되기도 했다. 올 초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공언한 공소장 비공개 방침은 역시 삼성에는 예외로 적용됐다. 방어권 보장, 무죄 추정의 원칙 등도 삼성에는 해당이 안되는 얘기가 됐다. 검찰 기소 이후 요즘 곳곳에서 삼성을 때린다. 시민단체들은 연일 삼성을 범죄집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삼성 임원들은 요즘 할 말이 있어도 꿀 먹은 벙어리다. 억울하다고 입을 열었다가 어디서 돌팔매를 맞을지 몰라서다.
삼성은 다른 기업들과 다르지 않다. 삼성이라고 특별대접을 받아선 안 되듯이, 삼성이라고 차별을 받아서도 안된다.
삼성에만 유독 가혹한 이런 현실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 사회가 구조적으로 무엇인가 뒤틀려 있다는 얘기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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