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구본영 칼럼]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구본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9.28 18:05

수정 2020.09.28 18:04

민간인이 북에 사살됐지만
군·정부 기능은 작동 안돼
국민 각자도생에 맡겨서야
[구본영 칼럼]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며칠 전 한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북한군에 사살 당한 참극이 빚어졌다. 이로 인한 충격파가 정국을 뒤흔들고 있다. 어업지도선에서 실종된 40대 일등항해사 이모씨가 총을 맞고 시신이 불태워졌다는 소식은 온 국민의 가슴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비무장 민간인 사살은 국제법상 전시에도 범죄다. 어느 시인이 그랬던가. "한 생명이 오는 건 온 우주가 다가오는 것"이라고. 그런데도 북측이 표류 중인 사람을 바다에서 6시간을 끌고 다니며 취조했다니…. 그것도 모자라 그 주검을 소각(우리 군 당국과 달리 북측은 부유물을 태웠다고 주장)한 만행을 저질렀다니 할 말을 잃게 된다.

북측의 잔혹행위도 '이해 불가'지만 정부의 대응 과정도 석연찮다.
유족들이 그럴 리가 없다는데 군과 정보당국이 감청정보가 있다는 둥 피해자의 '자진 월북설'을 흘린 대목이 그렇다. 북이 보낸 전화통지문을 보면 실족 후 표류했을 개연성에 더 무게가 실리면서다. 그가 피살 전 "대한민국 아무개입니다."라고 외쳤다니 말이다.

미스터리는 그뿐이 아니다. 군은 21일 그가 소연평도 해상에서 사라졌는데도 10시간 넘게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22일 오후 3시30분 황해도 등산곶 앞바다에서 북한군에 발견될 때까지 수색에도 실패했다. 이후 밤 9시40분쯤 총을 맞고 시신이 불타는 광경을 지켜만 봐야 했다. 군 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도 피살 10시간 만에 보고를 받았으나, 33시간 침묵했다. 그사이 이씨는 아무런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가 제 구실을 못하면? 개인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게오르규의 소설 '25시' 속 약소국 루마니아 농부 요한의 인생유전을 보라.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과 2차대전이란 시대상황에서 독일서 강제노동 중 아리안족 순혈로 오인돼 수용소장이 됐지만 부인은 소련군에 능욕 당해야 했다. 나중엔 미군 포로로 전범재판소에 회부됐으니, 국가란 울타리가 무너져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개인의 비극이었다. 이를 동명의 영화 라스트신에서 명배우 앤서니 퀸은 우는지, 웃는지 모를 명연기로 보여줬다.

어린 두 아이를 둔 가장의 비극의 농도가 '25시' 주인공보다 덜하겠나. 그가 희생되기까지 대한민국의 부재를 뼈아프게 돌아봐야 할 이유다. 정부는 지난 6월 이후 남북 간 모든 통신선이 차단됐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옹색한 변명으로 들린다. 국제상선 통신망으로도, 하다못해 확성기로도 북 단속정의 만행에 경고를 보내지 않았으니….

더군다나 청와대는 최근 남북 정상 간 친서교환 사실을 공개했다. 문 대통령의 친서엔 "김 위원장님의 생명존중 의지에 경의를 표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번 사건 전에 보낸 것이라지만, 친형 독살을 사주하고 고모부를 처형한 그인지라 선뜻 와닿지 않는다. 더 황당한 대목은 따로 있다. 친서를 주고받을 만큼 핫라인이 가동되고 있었음에도 이씨를 구명하는 데는 전혀 활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게 국가의 최우선 책무다.
돌이켜 보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파괴는 국민의 재산을 지키지 못한 사건이었다.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남북 정상이 친서를 주고받았지만, 이번엔 한 생명이 서해에서 스러져갔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문재인정부에서…. 국민에게 "알아서 살길을 찾으라"고 한다면 국가의 존재 이유는 뭔가. '슬기로운 국민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제1준칙이 고작 '각자도생'이라면 언젠가 다시 "이게 나라냐?"는 반문을 듣게 될 듯싶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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