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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 칼럼] 한국판 발렌베리, 왜 우린 안 되나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10.05 18:11

수정 2020.10.05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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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법 개정 같은 몽둥이보다
공익재단 같은 당근이 해법
낡은 기업 정책 틀을 바꿔야
[곽인찬 칼럼] 한국판 발렌베리, 왜 우린 안 되나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상법 개정안 등 공정3법에 찬성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재계가 분기탱천한 모습이다. 보수당 지도자가 진보 더불어민주당과 한 배를 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사실 문재인정부 상법 개정안은 7년 전 박근혜정부 개정안과 비슷하다. 감사는 다른 이사와 분리해서 뽑고,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이사를 상대로 책임을 추궁하는 다중대표소송제를 도입한다는 내용이 겹친다. 다른 점은 이번엔 흐지부지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민주당 혼자서도 힘이 넉넉한데 야당 지도자까지 같은 편에 섰으니 말이다.

재계는 고립무원이다. 재벌은 황제경영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편법승계도 여전하다. 상법 개정안은 두 관행에 과녁을 맞췄다. 재벌이 사방에 적을 둔 것은 자업자득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의문이 든다. 밖에선 일류로 통하는 우리 대기업들이 왜 안에선 욕먹을 짓을 그만두지 못하는 걸까.

기업은 기업대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들어 놓고 매질을 하기 때문이다. 최고 65%를 물리는 상속세가 대표적이다. 신장섭 교수(싱가포르국립대)는 "(재벌 후계자가) 자산을 팔지 않고 경영권을 확보하며 상속을 받으려면 담보대출 받아서 세금을 먼저 내고, 기업을 더 키우면서 평생 빚을 갚아 나가겠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업이란 무엇인가').

간판기업 삼성도 이 굴레를 피해가지 못했다. 총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5월 대국민사과에서 "저를 둘러싼 논란은 근본적으로 경영권 승계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자녀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럼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내려온 삼성 경영권은 어떻게 되나. 공익재단이 대안이다.

160년 역사를 가진 스웨덴 발렌베리그룹이 모델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스웨덴은 발렌베리공화국이다. 에릭슨, 일렉트로룩스, SAAB, 나스닥 등 굵직한 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이들이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한다. 발렌베리는 공익재단을 통해 가업을 잇는다. 103년 전인 1917년 처음 재단이 세워졌다. 그 아래 재단자산관리(FAM) 회사가 있고, FAM은 다시 지주사 인베스터(Investor AB)를 통해 자회사를 통제한다. 경영은 대부분 전문경영자에게 맡긴다. 재단은 스웨덴 공동체를 살찌우는 키다리 아저씨 역할을 한다. 지금껏 공익사업에 쓴 돈이 총 350억크로나(약 4조5300억원)에 이른다.

공익재단은 부자가 명예롭게 물러설 수 있는 공간이다. 미국은 빌 게이츠(빌 앤드 멀린다 재단)가 선배 카네기·록펠러의 뒤를 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공익재단을 설립하는 길도 막혔다. 의결권 주식은 5%까지만 증여세를 면제하기 때문이다. 5% 지분 갖고는 기업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할 수 없다. 앞으로 가자니 상속세가 가로막고, 뒤로 가자니 공익재단 문이 닫혔다. 이러니까 자꾸 편법을 찾는다.

상법 개정안은 더 센 몽둥이다. 그러나 근본 해법은 아니다. 오히려 기상천외한 편법을 자극할 공산이 크다. 경제학자인 김종인 위원장에게 당부한다. 지난 반세기 기업 정책은 시효를 다했다.
이제 전략의 틀 자체를 바꿀 때가 됐다. 공익재단을 통한 경영권 승계방안을 깊이 고민해주기 바란다.
언제까지 재벌 승계를 놓고 온 나라가 에너지를 낭비할 텐가. 우리도 한국판 발렌베리를 가질 때가 됐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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