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이구순의 느린걸음

[이구순의 느린 걸음] 가상자산 때려잡다 초가삼간 다 탄다

이구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10.13 18:38

수정 2020.10.13 18:40

[이구순의 느린 걸음] 가상자산 때려잡다 초가삼간 다 탄다
출근해 하는 첫 일이 밤사이 해외에서 일어난 블록체인·가상자산, 디지털경제 뉴스를 정리하는 일이다. 해외 주요 국가들의 디지털경제 대응을 정리하다 보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속도감을 느낀다.

중국 정부는 따라잡기도 어려울 만큼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디지털로 나아가고 있다. 인민은행이 디지털화폐 발행을 논의하던 게 엊그제인데, 벌써 선전시에서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디지털화폐 발급과 사용 실험에 착수했다. 신중하던 일본은 내년부터 디지털화폐 실험에 착수하겠다고 공식화했다. 유럽 중앙은행도 내년 4월쯤 공식 입장을 내놓겠단다.
주요 국가들이 디지털경제를 향해 달리니 국제기구들도 빠르게 따라잡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내년 중 가상자산 과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로 했다. 주요 20개국(G20), 국제통화기금(IMF), 국제결제은행(BIS), 세계은행(WB)은 글로벌 금융시스템 안에서 중앙은행 발행 디지털화폐(CBDC)를 사용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만들겠단다.

글로벌 회계·컨설팅업체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블록체인을 재고해야 하는 1조달러짜리 이유'라는 보고서를 통해 블록체인 기술이 향후 10년간 글로벌 국내총생산(GDP)의 1.4%에 달하는 1조7600억달러(약 2020조원) 규모의 경제성장을 촉발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성큼성큼 디지털경제로 들어가고 있는 중국이 블록체인 경제성장의 성과를 가장 많이 가져간단다. 전체 성장의 25%에 달하는 4404억달러(약 506조6361억원)가 중국 몫이다.

아침 첫 일을 마무리하고 국내 소식들을 정리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풀이 죽고, 타이핑 속도가 떨어진다. 가상자산은 무조건 때려잡아야 하는 투기수단에 불과하다는 정책은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멈춰 있다. 개정 특금법 시행으로 가상자산 기업들이 내년부터 제도권 금융 언저리라도 자리를 얻는 것 아니냐 기대했더니 "턱도 없는 소리"라며 일거에 퇴짜다. 규제만 할 뿐 금융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단다. 디지털화폐 실험을 하겠다는 한국은행은 움직임을 자세히 좀 물어볼라치면 "그냥 내부에서 실험해 보는 것뿐"이라며 몸을 사린다. 국내 블록체인 기업들은 씨가 말라간다. 블록체인·가상자산·디지털경제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한국 블록체인 산업도 풀이 죽어가니 타이핑에 힘이 안 생긴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위원장이 "혁신은 민간영역에서 나오는 것이며, 정부의 역할은 스스로 혁신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민간의 혁신을 감독하는 것"이라며 정부를 향해 쓴소리를 했다. 블록체인·가상자산 분야의 빠른 발전을 따라잡지 못하는 정부의 보수적 규제가 미국에 대한 투자를 꺼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미국의 위원장 정도는 못되지만 나도 정부를 향해 한마디 하고 싶다. 가상자산 투기 잡는 데 몰빵하다 성장의 기회까지 모두 태워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투기근절책은 그것대로 만들고, 기술·산업 발전을 위한 대책도 한쪽에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2020조나 되는 성장기회를 그냥 태워버리면 안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cafe9@fnnews.com 이구순 블록체인팀장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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