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최진숙 칼럼] 이이효재와 긴즈버그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10.14 18:15

수정 2020.10.14 18:15

불의·차별 맞선 공정의 전사
96·87세 평생 경이로운 삶
"자신을 사랑하라, 품위있게"
[최진숙 칼럼] 이이효재와 긴즈버그
지난달 87세 나이로 타계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50여년 법조인생 중 27년을 미국 대법관으로 지냈다. 자신의 후임 지명은 대선 후 해달라는 말을 남겼으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그러지 않았다. 보수 중의 보수 에이미 코니 배럿 지명은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성대하게 열린 행사장. 하필 거기서 백악관 인사들이 대거 코로나19에 감염됐다. 대통령의 양성 판정도 이 직후 나왔다. 보다시피 대선 판세는 그 후 조 바이든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이쯤 되니 긴즈버그가 나라를 구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물론 결과는 가봐야 알겠지만.

'노토리어스(악명 높은) RBG'의 저자 아이린 카먼은 미국 법조인사 중 긴즈버그처럼 폭발적 인기를 누린 이는 단연코 없었다고 책에 썼다. 노(老)대법관의 모든 이미지가 밀레니얼 세대에게 놀이로 소비되고,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은 지금도 흥미로운 주제다. 155㎝ 작은 체구,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며, 수줍음도 꽤 탔다. 하지만 차별에 맞선 그 오랜 시간 한결같음에 감동과 위로가 있었다.

긴즈버그의 생명력은 시대의 폐부를 찌르는 언어에 있다. 노예폐지론자 세라 그림케의 말을 인용한 변론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호의를 베풀어달라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목을 밟고 있는 그 발을 치워달라는 것뿐입니다." 여성을 넘어 사회 모든 평등을 부르짖었다. "모든 젠더 차별은 양날의 칼이다. 그것은 양쪽으로 작용한다." 전투력의 밑천은 긍정의 삶이었다. "분노처럼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감정에 결코 굴복하지 말 것." 이 말을 10대부터 품고 살았다.

그가 세상을 뜬 지 한달도 안 돼 한국 여성계의 큰별 이이효재 선생의 부음이 날아왔다. 올해로 96세. 그의 전기 '이이효재'를 쓴 작가 박정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나라 여성 중 단 한 명도 이이효재에게 빚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단언한다. 왜 아니겠는가. 3대째 이어진 목회자 집안의 신학문 분위기, 신여성 고모 이애시는 선생의 강인함에 토대가 됐다. 1947년 12월 인천항. 거기서 동생 효숙과 미군 수송선을 타고 오키나와를 거쳐 미국으로 갔다. 환희에 찬 유학이기보다 사명감에 불탄 도전이었다.

여성 25세 정년폐지, 개정에 개정을 거듭한 가족법, 마침내 호주제 폐지. 파란만장했던 한국여성운동사 한복판에서 선생은 큰 나무이자 뿌리였다. 평생 투사였지만 선생을 둘러싼 정서는 푸근함이다. 이화여대 교수 시절 제자들의 인생멘토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월급으로 제자 생활비를 댄 일화가 부지기수다. 평생의 벗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이슈로 끌어올린 건 "나도 위안부로 끌려갔을 수 있었다"는 부채의식 때문이었다. 서울생활을 접고 고향 진해로 내려갈 때 집 판 돈과 재산은 여성단체에 헌납했다. 그렇게 무욕(無欲)의 삶을 살았다. 진해에선 척박한 환경을 바꾸려고 '기적의 도서관'을 지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아이들은 '효재 할머니'라고 불렀다.
말년의 지역봉사가 가장 행복했다고 선생은 뒷날 고백했다.

이이효재와 긴즈버그, 두 걸출한 어른의 삶을 돌아보며 우리 시대 공정과 정의를 다시 생각한다.
사심을 버리고 기본으로 돌아가라.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헌신의 끈을 놓지 않으며 이런 말을 남겼다. "자신을 사랑하라, 그 사랑으로 인류의 한 구성원으로 뿌리내리길. 품위있게 살자(이이효재)." "어찌 됐건, 희망은 영원히 샘솟는다(긴즈버그)."

jins@fnnews.com 최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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