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차별 맞선 공정의 전사
96·87세 평생 경이로운 삶
"자신을 사랑하라, 품위있게"
96·87세 평생 경이로운 삶
"자신을 사랑하라, 품위있게"
'노토리어스(악명 높은) RBG'의 저자 아이린 카먼은 미국 법조인사 중 긴즈버그처럼 폭발적 인기를 누린 이는 단연코 없었다고 책에 썼다. 노(老)대법관의 모든 이미지가 밀레니얼 세대에게 놀이로 소비되고,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은 지금도 흥미로운 주제다. 155㎝ 작은 체구,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며, 수줍음도 꽤 탔다. 하지만 차별에 맞선 그 오랜 시간 한결같음에 감동과 위로가 있었다.
긴즈버그의 생명력은 시대의 폐부를 찌르는 언어에 있다. 노예폐지론자 세라 그림케의 말을 인용한 변론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호의를 베풀어달라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목을 밟고 있는 그 발을 치워달라는 것뿐입니다." 여성을 넘어 사회 모든 평등을 부르짖었다. "모든 젠더 차별은 양날의 칼이다. 그것은 양쪽으로 작용한다." 전투력의 밑천은 긍정의 삶이었다. "분노처럼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감정에 결코 굴복하지 말 것." 이 말을 10대부터 품고 살았다.
그가 세상을 뜬 지 한달도 안 돼 한국 여성계의 큰별 이이효재 선생의 부음이 날아왔다. 올해로 96세. 그의 전기 '이이효재'를 쓴 작가 박정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나라 여성 중 단 한 명도 이이효재에게 빚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단언한다. 왜 아니겠는가. 3대째 이어진 목회자 집안의 신학문 분위기, 신여성 고모 이애시는 선생의 강인함에 토대가 됐다. 1947년 12월 인천항. 거기서 동생 효숙과 미군 수송선을 타고 오키나와를 거쳐 미국으로 갔다. 환희에 찬 유학이기보다 사명감에 불탄 도전이었다.
여성 25세 정년폐지, 개정에 개정을 거듭한 가족법, 마침내 호주제 폐지. 파란만장했던 한국여성운동사 한복판에서 선생은 큰 나무이자 뿌리였다. 평생 투사였지만 선생을 둘러싼 정서는 푸근함이다. 이화여대 교수 시절 제자들의 인생멘토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월급으로 제자 생활비를 댄 일화가 부지기수다. 평생의 벗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이슈로 끌어올린 건 "나도 위안부로 끌려갔을 수 있었다"는 부채의식 때문이었다. 서울생활을 접고 고향 진해로 내려갈 때 집 판 돈과 재산은 여성단체에 헌납했다. 그렇게 무욕(無欲)의 삶을 살았다. 진해에선 척박한 환경을 바꾸려고 '기적의 도서관'을 지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아이들은 '효재 할머니'라고 불렀다. 말년의 지역봉사가 가장 행복했다고 선생은 뒷날 고백했다.
이이효재와 긴즈버그, 두 걸출한 어른의 삶을 돌아보며 우리 시대 공정과 정의를 다시 생각한다. 사심을 버리고 기본으로 돌아가라.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헌신의 끈을 놓지 않으며 이런 말을 남겼다. "자신을 사랑하라, 그 사랑으로 인류의 한 구성원으로 뿌리내리길. 품위있게 살자(이이효재)." "어찌 됐건, 희망은 영원히 샘솟는다(긴즈버그)."
jins@fnnews.com 최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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