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고단했던 삶 모진 세월을 다 잊고 편히 쉬소서…통일 되는 날 다시 오소서

김도우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12.09 05:00

수정 2020.12.09 05:00

‘송환 대기 50년’ 비전향 장기수 오기태씨 별세
한번만, 딱 한번 만이라도…아들 못 본 채 떠나 
그놈의 신념하나 때문에 21년 감옥에서 살아
얼마나 가고 싶었을까. 얼마나 보고 싶을까
막내아들 이름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난 비전향장기수 오기태 선생.
막내아들 이름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난 비전향장기수 오기태 선생.


【파이낸셜뉴스 전주=김도우 기자】 비전향 장기수 오기태 선생(본명 장재필)이 꿈속에서도 소원하던 고향, 신념의 조국으로 가지 못하고 타계했다. 향년 88세.

2차 송환 희망자였던 선생은 지난 2008년부터 대장암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해왔다.

대장암 말기의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도 북측에 두고 온 처자식들과의 재회를 꿈꾸며 송환을 기다려 왔지만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51년! 선생의 가족과 고향, 그리고 당신 신념의 조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려온 시간이다.

1만8,600번 날이 새고 저무는 그 긴 세월을 꿋꿋이 견디고 기다려온 고인이 얼어붙은 겨울, 이른 새벽길을 밟아 떠나셨다.

이대종 전농 전북도연맹 의장이 오기태 선생 약력을 낭독하고 있다.<div id='ad_body2' class='ad_center'></div>
이대종 전농 전북도연맹 의장이 오기태 선생 약력을 낭독하고 있다.

그렇게 떠난 길, 바람이 되어 꿈결에도 사무치게 그리던 고향으로 달려가셨을까.

한 번만, 딱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던 아이들이 고이 잠든 방을 두드려 두 팔 벌려 안으셨을까.

생애를 다 바쳐 지켜냈던 신념의 조국 산천을 휘감아 돌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을까.

21년의 감옥살이도 모진 고문과 억압도 당신의 신념을 꺾지 못한 것처럼.

2018년 겨울, 당신의 조국에서 젊은이들이 왔다는 소식에 노구를 이끌고 평창으로 달려가 한반도기를 힘차게 흔들었다.

김진왕씨가 호상 인사를 전하고 있다.
김진왕씨가 호상 인사를 전하고 있다.

고인은 전남 신안군 임자도에서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18살 때까지 고향에서 농사일을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빨치산 활동을 하고 있던 형의 권유로 의용군에 입대했다.

3년 내내 전투를 치르며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전쟁이 끝나고도 한동안 군에 남았다.

1957년 군을 제대 후 김외식씨(86)를 만나 결혼했다.

한반도 최북단인 함경북도 온성군에 자리를 잡았고 4남매를 두었다. 군 인민위원회에서 일하던 선생은 1969년 중앙당에 소환돼 대남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

오은미 전 여농 전북연합 부회장이 '굽이치는 임진강' 추모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오은미 전 여농 전북연합 부회장이 '굽이치는 임진강' 추모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고인은 노동자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등 업무수행을 하고 복귀를 기다리다 경찰에 체포됐다.

국가보안법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1년의 옥살이를 하고 1989년 가석방되었다.

무지막지한 전향공작, 추운 겨울 작은 방에다 여러 명을 몰아놓고 찬물을 들이붓고 잠도 재우지 않았다.

두 손을 뒤로 묶은 채 개밥 먹듯이 주는 밥을 먹어야 했다. 이런 고문과 폭력에 의한 강제전향은 선생을 남한에 남게 했다.

고단했던 삶 모진 세월을 다 잊고 편히 쉬소서…통일 되는 날 다시 오소서

2000년 6.15공동선언에 의해 63명의 장기수 선생들이 북송된 후 이듬해 2월 선생을 비롯한 전주지역의 장기수 선생들이 ‘강제전향은 전향이 아니다’며 강제전향 무효 기자회견을 전주고백교회에서 열었다.

2차 송환 운동의 시작이 바로 전주에서 비롯된 것이다.

송환을 기다리던 중 2005년 11월 급성폐렴으로 두 달 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다.

2008년에는 대장암으로 투병생활을 했다.

급성 페렴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선생은 자식이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에 중국행을 감행한다.

비전향 장기수 고 오기태선생.
비전향 장기수 고 오기태선생.

도문강가! 단둥과 고향집 은성군은 손에 닿을 듯한 거리.

지리를 꿰고 있어 손에 물 한번 안 묻히고 건널 수 있지만, 전주에 남은 장기수 선생들이 다칠까 봐 어쩌지 못하고 다시 귀국을 하게 되었다.

‘죽기 전에 아이들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지’ 하며 가족을 만나야겠다는 일념으로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산행을 하고 그마저도 못하면 집에서 요가라도 하며 얼음 같은 세월을 견디어냈다.

그러나 선생은 12월 7일 새벽 4시, 알람소리를 듣지 못했다.

“죽어서 고향에 뼈라도 묻히게. 살아생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소원을 가슴에 품은 채, 같이 사는 조상이 선생 불편하지 않게 홀연 가셨다.

1만8천6백 번 날이 새고 저무는 그 긴 세월을 꿋꿋이 견디고 기다려온 당신이 이 얼어붙은 겨울, 이른 새벽길을 밟아 떠나셨습니다.
1만8천6백 번 날이 새고 저무는 그 긴 세월을 꿋꿋이 견디고 기다려온 당신이 이 얼어붙은 겨울, 이른 새벽길을 밟아 떠나셨습니다.

선생의 빈소는 전주예수병원 장례식장이었다.

추도식은 8일 오후 6시 30분에 진행했다.

이대종 전농의장이 약력을 낭독했다. 이 의장은 “고인은 아이들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떠나보내니 가슴에 이는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다”고 했다.

김혜순 양심수 후원회장과 노병섭 장례위원회 본부장이 추모사를 했다.

오은미 전 여농전북연합 부회장이 ‘굽이치는 임진강’ 이라는 추모의 노래를 불렀다.

정충식 전농 전북도연맹 정책위원장이 추모시를 낭독했고 김윤수 (사)한몸평화이사장이 추모의 말을 전했다.

소대식 성공회 전주교회 신도회장과 김진왕씨가 추모 인사를 전했다.

노병섭, 소대식, 이대종, 하연호씨가 고인의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방용승 전북겨레하나 공동대표가 집행위원장으로 수고했다.

선생의 발인은 9일 오전 9시다.
유해는 화장된 후 전주시 효자 공원묘지에 안치될 예정이다.

964425@fnnews.com 김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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