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이구순의 느린걸음

[이구순의 느린 걸음] 지상파 프로그램은 부르는 게 값?

이구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12.22 18:00

수정 2020.12.22 18:00

[이구순의 느린 걸음] 지상파 프로그램은 부르는 게 값?
'지상파 방송사, VOD 중단 통보' '시청자 볼모 재송신료 분쟁' 이런 제목의 기사들이 나오는 것을 보니 연말이 됐구나 싶다. 어림잡아 10년째 지상파 방송사들과 케이블TV·IPTV 업체 간 재송신비용 분쟁이 되풀이되니 반갑지 않은 연말행사처럼 돼버렸다.

유료방송 회사들이 KBS, MBC, SBS 같은 지상파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재송신할 때 프로그램 값을 얼마로 치는 것이 타당한지 협상해야 하는데, 협상이 매년 다툼이 된다.

얼핏 보기에 기업들이 이익 좀 늘리겠다고 흥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이 다툼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선 시청자들이 지상파 프로그램 시청권에 피해를 본다. 어느 해인가 협상이 결렬돼 케이블TV에서 지상파 방송사의 프로그램이 며칠씩이나 사라졌던 일도 있다.
요즘 누가 지상파 프로그램 챙겨 보느냐고 타박할 사람도 있겠지만, 정작 그게 더 큰 문제다. 결국 그 빈자리를 넷플릭스나 유튜브가 메웠다. 결국 지상파 방송사와 유료방송사의 흥정이 다툼으로 번지면 시청자들이 피해를 보고 한국 콘텐츠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피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작심하고 좀 따져봐야겠다. 다툼의 핵심은 지상파 방송사 프로그램 값을 얼마로 치는 것이 타당한지다. 그런데 그 값에 대한 기준이 없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유료방송 회사들과 프로그램 값을 흥정하면서 제작비용, 프로그램당 시청률 같은 계산식을 내놓지 않는다. 그저 부르는 게 값이다. 그것도 매년 값을 올린다. 값을 올리는 정당한 이유도 알려주지 않는다.

게다가 유료방송 사업자들은 값이 마음에 들지 않는 프로그램 값을 지불하지 않을 권리도 사실상 없다. 그러니 애초부터 흥정이 진행될 리가 없다. 그저 부르는 값을 줄 수 있다 없다 다툴 뿐이다.

이쯤 되면 프로그램 값을 산정할 기준을 만들고, 이해 당사자들을 모아 협상을 이끌어가는 중재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흥정의 기준조차 없는 게 다툼의 원인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유료방송 담당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아예 이 다툼에는 가까이 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저 흥정하는 기업들 간의 문제라고만 외면한다.

정부는 개인이나 기업의 사적 계약을 보장해야 한다. 그러나 계약이 정당하게 이뤄질 수 있을 만큼 당사자들이 균형 잡힌 위치에 있지 않을 때 정부가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는 것 역시 계약을 보장하는 방법이다. 그것이 정부의 의무다. 임대인과 임차인 간 흥정에 법률을 만들어 개입하고, 노동자와 회사의 임금인상률 결정에 정부가 중재자로 나서는 이유가 정당한 계약을 보장하기 위한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공익성 공공성'을 금과옥조로 얘기하는 지상파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국민이 안심하고 볼 수 있도록 정부가 협상 중재자로 나섰으면 한다.
'부르는 게 값'인 지상파 방송사들의 프로그램 값을 계산할 타당한 계산식을 정하고, 해마다 특수한 상황을 의논하도록 테이블을 만들어 흥정이 다툼이 되지 않도록 주도해 줬으면 한다. 벌써 10년이나 끌어온 싸움을 정부가 더 이상 외면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년 연말에는 '지상파 방송사, VOD 중단 통보' '시청자 볼모 재송신료 분쟁' 이런 제목의 기사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정부가 의무를 다해줬으면 한다. cafe9@fnnews.com 이구순 정보미디어부 블록체인팀 부국장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