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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의 특급논설] 김범수 재단, 곳곳에 암초

재산 절반 5조 기부 약속
한국판 카네기 재단 가능

부자들이 쉽게 기부하게
국회가 법·제도 정비하길
 
경주 최부자 전통을 잇는
카카오 김부자 탄생 기대 
[곽인찬의 특급논설] 김범수 재단, 곳곳에 암초
카카오 라이언 캐릭터와 김범수 카카오 의장. 김 의장은 8일 신년 카카오톡 메시지에서 재산 절반을 공동체를 위해 쓰겠다고 말했다./사진=뉴스1


[파이낸셜뉴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본다.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이 8일 소띠해 신년 메시지에서 재산 절반 이상을 사회를 위해 쓰겠다고 말했다. 카카오는 계열사가 100개 가까운 재계 23위 그룹이다. 창업자인 김 의장의 재산은 줄잡아 10조원에 이른다. 절반이면 5조원이다. 와, 이 돈을 공동체를 위해 쓴다니 이 얼마나 좋은가. 세상을 좀 오래 산 사람은 안다. 기업인이 자기 재산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를 말이다. 예전엔 군사정변이나 일어나야 어쩔 수 없이 자기 재산을 내놨다. 안 그러면 군인들한테 잡혀가니까. 그것도 시늉만 했을 뿐 '부정축재' 기업인들이 실제로 얼마나 내놨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거 재벌과 다른 벤처 1세대  


김범수는 벤처 1세대다. 1966년생이니까 올해 55세다. 공자는 나이 쉰이면 천명, 곧 하늘의 뜻을 안다고 해서 지천명(知天命)이라고 불렀다. 사실 나는 김범수가 일을 낼 줄 알았다. 지난해 3월 카카오 출시 10주년 영상 메시지에서 그는 "카카오를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이끌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신년 메시지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격동의 시기에 사회문제가 다양한 방면에서 더욱 심화되는 것을 목도하며 더이상 결심을 더 늦추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다짐이 공식적인 약속이 될 수 있도록 적절한 기부서약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김 의장의 메시지를 들으며 문득 옥에 갇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떠올랐다. 이 부회장은 작년 말에 열린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최후진술에서 "삼성은 달라질 것"이라며 "회사의 가치를 높이고 사회에 기여하는 일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선고를 앞둔 소송전략의 일환이라고? 꼭 그런 것 같진 않다. 이 부회장은 1월 말 직원들에게 보낸 옥중 메시지에서 "국민과 약속한 투자와 고용 창출 등 본분에 충실해야 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삼성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2년6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1968년생으로 김범수 의장과 또래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 한국형 부자 모델을 새로 써나가면 어떨까.

[곽인찬의 특급논설] 김범수 재단, 곳곳에 암초
2010년에 기빙 플레지(Giving Pledge) 회원이 된 사람들. 위에서 둘째줄에 마이클 블룸버그와 워런 버핏, 넷째줄에 빌 앤 멜린다 게이츠의 얼굴이 보인다. (사진자료=기빙플레지 웹사이트)
 
미국엔 카네기, 게이츠, 저커버그 재단


미국에 좋은 선례가 있다. 지난 2010년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의기투합해 '기빙 플레지' 운동을 펼쳤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게이츠와 투자의 전설 버핏은 슈퍼 울트라 초부자다. 둘은 세계 1위 갑부 자리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재산을 절반 넘게 내놓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기빙 플레지 회원이 된다. 2021년 현재 전세계 24개국 218명이 정식 회원이다.

기빙 플레지와 별도로 미국은 슈퍼리치들의 개인별 자선도 맹렬하다. 앤드류 카네기의 전통이 지금도 살아 숨쉰다. 철강왕 카네기는 1901년 66세 때 재산을 정리하고 박애주의자로 변신했다. 빌 게이츠는 지난 2000년, 그러니까 45세 때 자신과 아내 이름을 따서 빌 앤 멜린다 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세계 최대 민간 자선단체로 꼽힌다. 현재 게이츠의 재산은 1630억달러(약 183조원)로 추산된다. 아마도 2000년 이후에 태어난 지구촌 젊은이들은 게이츠를 DOS(PC 운영체제)를 만든 컴퓨터 도사가 아니라 백신 개발을 지원하는 박애주의자로 기억하지 않을까.

 
페이스북을 창업한 마크 저커버그는 경영과 자선을 병행하는 중이다. 당연히 그는 기빙 플레지 회원이다. 동시에 그는 2015년 아내와 자기 이름을 따서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라는 자선회사를 세웠다. 그의 나이 31세 때 일이다. 저커버그는 슈퍼리치가 된 것만큼이나 박애주의자가 된 것도 빠르다.

정치권이 기부 쉽게 길 활짝 열어주길


한국에선 맘대로 박애주의자가 되기도 쉽지 않다. 김범수 의장은 "카카오가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의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사람을 찾고 지원해 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는데 머잖아 이런저런 난관에 부닥칠 공산이 크다. 가장 높은 벽은 기업인을 보는 삐딱한 시선이다. 좋은 데 돈을 써도 무슨 꿍꿍이가 있지 않나 의심하는 눈초리가 매섭다. 사실 기업인 책임도 있다. 과거 변칙 상속이 성행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법·제도적인 제약도 가시밭길이다. 통상 다른 나라 슈퍼부자들은 재단(공익법인)을 사회적 기여의 통로로 삼는다. 스웨덴 발렌베리 그룹은 지주사 인베스터AB를 통해 계열사를 지배한다. 그런데 인베스터AB 지분의 57%가 발레베리재단 소유다. 이러니 발레베리 가문은 경영권 걱정 없이 재단을 통해 공동체를 위한 교육, 과학 프로젝트를 지원한다.

 
가칭 김범수 재단이 5조원을 굴리려면 암초가 한둘이 아니다. 상속·증여세법 상 재단에 기부할 때 의결권 있는 주식은 5%까지만 증여세를 면제한다. 경영권 편법 상속을 막기 위해서다. 그 통에 진짜 좋은 일을 하고 싶은 사람도 재단에 재산을 기부하는 길이 막혔다. 김 의장의 카카오 지분율은 약 14%다. 여기에 지주사 케이큐브홀딩스가 가진 카카오 지분 11%를 합치면 모두 25%에 이른다. 지주사는 김 의장 개인 회사다. 재산 절반이면 지분율 12∼13%에 해당한다. 5%를 훌쩍 넘어선다.

카네기재단이 부럽다고? 우리도 얼마든지 김범수재단을 가질 수 있다. 슈퍼리치가 자기 재산을 공동체를 위해 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면 말이다. 특히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구시대의 유물 같은 상속증여세법, 공정거래법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을 창업한 김봉진 대표는 2년 전 언론과 인터뷰에서 "기부 방법을 몰라 처음엔 제 취지에 맞게 돈을 써줄 재단을 세울 생각을 했는데 설립 요건과 절차가 무척 까다로웠다. 재산을 은닉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들려왔다.
그래서 바로 접었다"고 말했다(중앙일보 2019년 4월1일).

김범수 의장에 당부한다. 자수성가한 벤처 1세대는 과거 재벌과 다르다는 걸 본때 있게 보여달라. 이왕 어려운 결정 내렸으니 한국형 부자모델 구축을 위한 총대도 메주기 바란다. 김범수 모델이 나오면 그 뒤로 김정주(넥슨), 이해진(네이버), 김봉진(배민) 모델이 줄을 이을 수 있다. 훗날 어린이들이 경주 최부자를 넘어 카카오 김부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곽인찬의 특급논설] 김범수 재단, 곳곳에 암초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