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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시선] 한국형 카네기 우리도 가능하다

[강남시선] 한국형 카네기 우리도 가능하다
조선시대 최고의 여성 거상 김만덕(1739~1812)은 천민 출신이다. 어릴 적 고아로 자라 천신만고 끝에 큰돈을 벌었다. 1793년 제주도에 연이은 재해로 백성들이 굶어죽자 전 재산을 기부했다. 크게 탄복한 정조는 '의녀반수'라는 여성으로서 최고의 벼슬을 내렸다.

지난 8일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이 재산 절반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했다. 어림잡아 5조원이 넘는다. 이어 김봉진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 의장도 재산 절반 이상 기부를 약속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세계적 기부클럽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 회원이 됐다. 기빙 플레지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 투자 귀재 워런 버핏이 2010년부터 시작한 자발적 사회기부 운동이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등 쟁쟁한 슈퍼리치들이 회원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민자 출신으로 철강왕이 된 앤드루 카네기는 은퇴 후 75세 때 뉴욕에 카네기재단을 세워 평생 박애주의자로 살았다. 이에 감명받은 석유재벌 존 데이비슨 록펠러도 1913년 재단을 만들어 다양한 자선사업을 펼쳤다. 빌 게이츠는 2000년 아내와 함께 세계 최대 민간 자선단체 빌 앤 멜린다 재단을 설립했다. 저커버그도 아내 이름까지 따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라는 자선회사를 세웠다.

김범수·김봉진 의장은 흙수저 출신이다. 벤처 1세대답게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잠시 김범수 재단·김봉진 재단의 등장을 상상해봤다. 아뿔싸, 한국에선 공익재단 설립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우선 부자가 기부한다면 무조건 색안경부터 끼고 본다. 기부라는 울타리 뒤에 분명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다고 여긴다. 사실 기업인 책임도 있다. 종래 일부 기업이 공익재단을 앞세워 편법 상속·증여를 일삼은 탓이다. 과거 정경유착이 횡행하던 시절 흑역사도 기업 불신을 키웠다. 어쩌면 수조원 이상 조건 없이 내놓는다고 하니 대놓고 의심부터 하는 게 무리는 아니다.

현행법도 암초다. 상속·증여세법상 공익재단을 만들려 해도 의결권 있는 주식은 5%까지만 세금(증여세)이 면제된다. 김 의장 소유 지분은 총 25%로 절반만 해도 5%를 훌쩍 넘는다. 아무리 좋은 일에 돈을 쓰고 싶어도 재단에 기부할 길이 없다. 이러니 한국판 카네기·빌게이츠 재단이 나올 수 없다.

2008년 한 기업인이 모교에 180억원어치 주식을 기부했다가 세무당국에 의해 140억원 증여세가 부과됐다. 사회환원이라는 선의가 경직된 법과 제도의 틀 속에 갇힌 꼴이다. 가족기업이 많은 독일은 공익재단만 2만개가 넘는다. 시장경제로 번 막대한 이익을 사회에 되돌려주는 게 당연하다는 기업가 정신이 뼈대다. 경영권 걱정 없이 재단을 통해 다양한 지원을 하는 스웨덴 발렌베리그룹도 본보기다.

기업 팔을 비트는 관제 기부는 진정한 사회환원이 될 수 없다.
김봉진 의장은 한때 재단을 만들려다가 설립요건이 까다롭고 재산은닉 비판도 있어 바로 접었다고 한다.

언제까지 기업인을 의심하고 째려만 볼 텐가. 어렵게 번 재산을 기부한다는데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길을 막아서야 되겠나.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우리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지만, 나눔으로 인생을 만들어 간다"고 했다. 김범수·김봉진에 이어 김정주(넥슨)·이해진(네이버) 재단이 줄줄이 나와 한국형 부자모델로 자리잡느냐 여부는 이제 정부와 정치권에 달렸다.

haeneni@fnnews.com 정인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