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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앞에 자존심 버린 일본… 해외기업 유치 사활 걸었다

조은효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3.28 17:13

수정 2021.03.28 17:25

1980~90년대 적수 없었지만
미국·한국 치고 나오면서 몰락
뒤늦게 반도체 산업 재건 나서
'파운드리 최강' 대만 TSMC
2년 설득 끝에 연합전선 구축
인텔·삼성전자에도 손 내밀어
반도체 앞에 자존심 버린 일본… 해외기업 유치 사활 걸었다
【파이낸셜뉴스 도쿄=조은효 특파원】 지난 24일 일본 도쿄 관청가인 가스미가세키 소재 경제산업성에 일본 전자전기기업인 NEC, 후지쯔, 반도체 대기업 르네사스 테크놀로지 등 각사 관계자들이 속속 모였다. 이날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다시 일본 반도체 산업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였다. 이날 반도체 산업 관련 검토회에서 가지야마 히로시 일본 경제산업상은 "반도체 산업이 국가의 명운을 쥐고 있다"며 "정부 당국으로서 과감한 전략을 내놓겠다"고 강조했다.

과감한 전략의 핵심은 '해외 반도체 기업 유치'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석권했었던 "그 때의 자존심 따위는 다 버리고, 달려들어라." 최근 뒤늦게 반도체 산업 부활에 나선 일본 정부의 분위기다.

■해외기업 유치'수혈전략'

28일 NHK 등에 따르면 일본 경산성은 오는 5월을 데드라인으로 해외 반도체 유치 및 공동개발, 자동차용 반도체 투자 촉진 정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해외 기업 유치, 해외 기업과의 기술공동개발 등은 뒤쳐진 산업을 끌어올릴 수 있는 단기 속성 방편 중 하나다. 이를 통해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2020년대 중반까지 확보한다는 게 일본 정부의 목표다. 가지야마 경산상은 "한 번 더 일본에 반도체의 서플라이 체인을 만들고 싶다"며 반도체 산업 부활에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지난 2월 발표된 세계 1위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업체인 대만 TSMC의 일본 이바라키현 연구법인 건립 방안 역시 일본 정부가 자존심을 접고 달려들어 이뤄낸 성과다. 일본 경산성은 이미 지난 2019년께 TSMC에 '러브콜'을 보냈으나, 한 차례 실패한 바 있다. '재수 끝'에 성공한 셈이다. TSMC는 미·중 무역전쟁에 열을 올리던 미국 트럼프 정권과 손을 잡고, 120억달러(약 13조3000억원)규모의 파운드리 공장을 짓기로 한 것이다.

지난해 7월 일본 경산성이 다시 움직였다. 자존심을 버리고, TSMC와 재교섭에 들어간 것이다. 한국 삼성전자, 중국 반도체 기업들을 겨냥한 미·일·대만 간 반도체 연합 전선 구축이란 전략적 관점, 일본의 적극적 유치작전 등이 맞물리면서 TSMC가 반도체 패키징(후공정) 작업과 관련한 연구거점을 일본에 마련하기로 한 것이다. 일본 정부와 TSMC는 추후 일본 내 생산공장을 만드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정부는 나아가 인텔, 삼성전자 등과의 연대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이 앞세우고 있는 유인책은 일본 내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과의 연계다. 도쿄일렉트론(TEL), 호야, 도쿄오카공업(TOK), 신에츠 화학공업, JSR 등이 대표적인 반도체 소부장 기업이다. 이미 경산성은 캐논, 도쿄일렉트론 등에 차세대 반도체 개별 협력을 위해 약 420억엔(약 4336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가나가와현 등 지자체들도 해외 반도체, 게임 등 첨단 기업을 위해 보조금 지원 정책 가동에 나섰다.

■경제안보…'흔들리는 국제공급망'

일본이 글로벌 기업 유치에 적극나선 것은 사실, 이례적인 일이다. 반도체 산업의 몰락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중 무역전쟁, 중국의 반도체 무기화 가능성이 점차 커져가고 있는데다 최근 자동차용 반도체 공급 대란 등과 같은 리스크가 부상하면서, 경제안보 차원에서라도 '미래 산업의 쌀'인 차세대 반도체 산업에 다시 뛰어들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일본 반도체 산업은 지난 1980~90년대 세계 시장 점유율이 50% 육박할 정도로 세계 시장을 주도했었다. 전세계 반도체 10대 기업 가운데 NEC, 도시바, 히타치(이상 1~3위), 후지쓰(6위), 미쓰비시(9위) 등 일본 기업 5개사가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

위상은 오래 가지 못했다.1993년 미국에 1위 자리를 빼았겼고, 이어 삼성전자에 D램 분야 1위 자리를 내주면서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2012년 NEC, 히타치제작소가 반도체 사업 부분을 통합해 설립한 엘피다메모리는 파산했다. 이를 필두로 2017년 SK하이닉스 등에 도시바 메모리 사업부 매각에 이어 2019년 파나소닉의 반도체 사업 철수 등이 이뤄졌다.
그나마 히타치, 미쓰비시전기, NEC일렉트로닉스 반도체 사업 부분을 통합해 만든 르네사스 테크놀로지(2010년 발족)가 명맥을 잇고 있는 정도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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