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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맞은 한국 과학기술의 역사… "데카콘 스타트업 10개 키우겠다" [한국과학기술 이끄는 과학기술특성화대학]

김만기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4.26 17:56

수정 2021.04.26 17:56

한국과학기술원
이론·실무 겸비한
인재 양성의 요람
한국과학원 설립자금을 지원키로 한 미국은 지난 1970년 설립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미국 스탠퍼드대학 프레드릭 터만 명예교수를 단장으로 한 조사단을 한국에 파견했다. 정근모 박사(왼쪽 두 번째)와 터만 교수(오른쪽 첫 번째)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KAIST 제공
한국과학원 설립자금을 지원키로 한 미국은 지난 1970년 설립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미국 스탠퍼드대학 프레드릭 터만 명예교수를 단장으로 한 조사단을 한국에 파견했다. 정근모 박사(왼쪽 두 번째)와 터만 교수(오른쪽 첫 번째)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KAIST 제공

"국제적 명망을 가진 이공계 교육기관으로 성장해 학계의 본보기가 되는 학교, 학문적 역량을 자체적으로 개발해 교육계에 새로운 기원을 이룩하는 첨병의 임무를 수행하는 학교, 정치와 경제 각 분야의 리더를 배출하는 학교, 한국인 생활 수준의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는 학교."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올해 개교 50주년을 맞았다. 카이스트는 지난 1971년 서울 홍릉의 서울연구개발단지에서 한국과학원이란 이름으로 출범했다.


카이스트는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 시장을 석권하는 주요 산업분야의 혁신 과학기술을 탄생시키는 데 큰 밑거름이 됐다. 카이스트 출신 창업기업은 지난 2018년 기준 1830여개에 달하며, 이들 기업의 총 연 매출은 13조6000억원에 이른다.

카이스트는 지난 2월 개교 50주년 기념식에서 "기업가치가 10조원이 넘는 데카콘 스타트업 10개를 육성하겠다"고 선언했다. 이광형 제17대 KAIST 총장은 지난 3월 8일 취임식에서 'QAIST'라는 새 전략을 제시하면서 "향후 50년 후 연간 기술료 수입 1000억원 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대전 본원 전경. KAIST 제공
한국과학기술원(KAIST) 대전 본원 전경. KAIST 제공
KAIST 기계공학과 공경철 교수가 이끄는 팀 엔젤로보틱스의 김병욱 선수가 지난해 11월 13일 사이배슬론 2020 국제대회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금메달을 석권했다. KAIST 제공
KAIST 기계공학과 공경철 교수가 이끄는 팀 엔젤로보틱스의 김병욱 선수가 지난해 11월 13일 사이배슬론 2020 국제대회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금메달을 석권했다. KAIST 제공

■'최초'가 자연스러운 KAIST

카이스트는 1982년 아시아·태평양 지역 최초로 인터넷 시스템을 구축했다. 지난 1990년 대한민국 최초 인공지능(AI)연구센터 설립, 1992년 인공위성 우리별 1호 발사를 성공했다. 이처럼 카이스트는 우리나라 과학발전 역사에서 '최초'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은 다수의 훌륭한 연구 성과를 거두고 있다.

설립 초창기에는 실용기술을 개발해 국가의 산업 발전을 견인했다. 1980년대에는 국산기술 개발로 해외 의존도를 낮추는 등 과학기술 자립을 이끌어 국력 향상을 뒷받침했다. 1990년대에는 도전적인 연구를 선도해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 발사에 성공하는 등 첨단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아울러 인공지능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2002년), 소유즈 TMA-11호 우주비행사 배출(2008년), 무선충전 전기버스 개발(2009년), 자폐증 원인 유전자 발견(2012년), 미생물에서 가솔린 생산(2013년), 세계 재난로봇대회 우승(2015), 사이배슬론 국제대회 금메달(2020) 등 우리나라 '최초'로 기록된 과학기술 연구 성과들은 대한민국의 과학 발전 역사를 이끌어 온 카이스트의 역할을 증명한다. 현재는 AI, 웨어러블로봇, 시스템대사공학, 자율주행, 신소재 등의 분야에서 전 세계 학계를 선도하는 연구로 주목받고 있다.

■산학연 각계 지도층 인사 배출

카이스트가 배출한 고급 과학기술 인력은 2월 기준 박사 1만4418명, 석사 3만5513명, 학사 1만9457명 등 모두 총 6만9388명에 달한다. 이들은 우리나라 과학기술 및 산업 발전과 학생·교수창업을 견인해왔고 이제는 디지털경제 주역으로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카이스트 졸업생 중 45%가 산업체에 근무하고 있다. 대학교수가 31%, 정부와 공공기관 21%로 일하고 있으며 3%가 해외진출을 했다. 산업체 근무자 52%인 1700여명이 벤처·중견기업에 일하고 있다. 이 중 20%인 320여명이 최고경영자(CEO)로 재직 중이다.

카이스트의 설립 타당성 보고서를 작성했던 프레드릭 터만 박사는 개교 초창기에 부임한 신임 교원들에게 "산업계를 이끌어 갈 수준 높은 엔지니어를 양성해 한국적인 문제를 연구하고 해결해달라"고 부탁했다. 2006년에 퇴임한 나정웅 카이스트 명예교수는 '터만 박사의 당부가 40년 KAIST 연구 인생의 이정표가 돼주었다'고 회고한다.

카이스트는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연구개발을 통해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기술을 개발했다. 일례로 풍력발전기(1975년), 팩시밀리(1977년), 전자레인지(1978년), CT 영상 처리기술(1980년), 광범위 항생제(1982년), 워드프로세서(1983년), 초음파 영상 진단장치(1984년), 연탄가스 감지기(1987년), 지문인식 도어락(1990년), 386 마이크로프로세서(1995년), 잉크젯프린터헤드(1997년) 등이 대표적이다.

■과학기술로 한국경제 견인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은 취임 일성으로 '기술사업화 혁신을 통해 글로벌 가치를 창출하는 전략'을 전면적으로 내세웠다. 카이스트 관계자는 "다소 과하다는 평이 나올 정도로 창업교육 및 지원제도를 파격적으로 개편하고 한 개의 연구실에서 최소 하나의 창업기업이 나올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카이스트를 중심으로 대전·오송·세종을 잇는 혁신연구단지를 조성해 스타트업 기반의 신산업으로 기술 사업화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카이스트는 자체 개발 기술을 이전해 수익을 창출하는 기술사업화를 시행해 왔다. 누적 기술이전료만 570억원에 달한다.
첫 석사생이 입학한 지 10년째 되는 해인 1983년을 기준으로 75개 업체에 94건의 기술을 이전했으며, 12억3000만원의 수익을 창출했다.

김만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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