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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사]어촌마을 꾸며 유명 관광지로…전직 패션디자이너의 귀어

뉴스1

입력 2021.05.01 09:00

수정 2021.05.01 09:00

경남 거제시 일운면 옥화마을로 귀어한 홍수명 이장이 물고기를 들고 있다. © 뉴스1
경남 거제시 일운면 옥화마을로 귀어한 홍수명 이장이 물고기를 들고 있다. © 뉴스1


거제 옥화마을에 귀어한 홍수명 이장이 패션디자이너 시절 '대한민국'이란 브랜드의 한복 촬영을 하며 직접 모델을 하고 있다. © 뉴스1
거제 옥화마을에 귀어한 홍수명 이장이 패션디자이너 시절 '대한민국'이란 브랜드의 한복 촬영을 하며 직접 모델을 하고 있다. © 뉴스1


거제 옥화마을 벽화. © 뉴스1
거제 옥화마을 벽화. © 뉴스1


[편집자주]매년 40만~50만명이 귀농 귀촌하고 있다. 답답하고 삭막한 도시를 벗어나 자연을 통해 위로받고 지금과는 다른 제2의 삶을 영위하고 싶어서다.
한때 은퇴나 명퇴를 앞둔 사람들의 전유물로 여겼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30대와 그 이하 연령층이 매년 귀촌 인구의 4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농촌, 어촌, 산촌에서의 삶을 새로운 기회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얘기다. 뉴스1이 앞서 자연으로 들어가 정착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예비 귀촌인은 물론 지금도 기회가 되면 훌쩍 떠나고 싶은 많은 이들을 위해서다.

(경남=뉴스1) 강대한 기자 = “선교사의 마음이랄까요? 봉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귀어자에게)전하고 싶어요.”

26일 경남 거제시 일운면 옥화마을에서 만난 마을이장 홍수명씨(59)는 ‘귀어하려는 분에게는 전할 조언은 없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부산에서 태어난 홍씨는 일찍이 광복동에서 리어카에 액세서리를 담아 팔며 패션에 관심을 가졌다. 그렇게 패션업계에 자연스레 발을 내딛고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의 생활한복도 만들었다.

이 브랜드를 들고 1988년 상경해 패션디자이너로서 일했다.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로 패션잡지를 만들 때는 그 시절 흔치 않던 181㎝의 큰 키를 활용해 본인이 직접 모델을 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자리를 잡고 15년여를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평소 즐기던 갯바위 낚시를 위해 보름정도 휴가를 내고 거제도 일주를 계획했다.

거제 곳곳을 돌며 낚시를 즐기던 홍씨는 우연한 만남으로 인생을 변곡점을 맞는다. 지금의 아내를 거제에서 만난 것. 이를 기화로 패션디자이너로서 지난 노고가 무색해질 정도로 단박에 업을 청산하고 거제행을 결정했다.

휴가 때나 시간이 날 때면 수시로 거제를 찾아 낚시를 즐겼기에 지역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바다에 대한 향수·동경 같은 마음도 함께 2002년 거제 땅에 발을 붙였다.

처음부터 어촌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당시 조선업이 초 호황기던 시기로 대우조선해양이 위치한 옥포동에서 고깃집을 운영했다. 더불어 취미활동인 낚시는 더 편하게 즐겼다.

고깃집은 자갈밭을 이용해 낮에는 세차장으로, 밤엔 재즈음악을 틀어주며 꽤나 성황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가게는 문을 닫게 됐고, 홍씨는 지역 부동산 개발업에 뛰어 들었다.

이마저도 2011년쯤 접고 본격 귀어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럴거면 서울에서 일을 하지, 내가 왜 이러고 있나”라는 생각에 한 결심이었다. 귀어할 곳은 이미 마음속에 정해뒀다. 아내를 만난 옥화마을이었다.

홍씨는 “동그랗게 생긴 만(灣)이 엄마의 품같이 포근했다”고 옥화마을을 설명했다. 마을에 와서는 바로 어업에 뛰어들지는 못했다. “어업은 돌발상황에 대처한다든지 경험치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생업에 대한 고민은 자신의 특기인 패션디자인을 활용했다. 옥화마을의 자연경관을 관광 상품으로 연계하는 복안이었다. 홍씨는 ‘아이러브거제’라는 1박2일 낚시 여행 상품을 만들었다. 마을 사람 중 선박을 가진 사람을 섭외해 낚싯배를 마련했다.

주변의 반응은 생각보다 더 컸다. 1인에 10만원 정도하는 체류형 관광에 많게는 한달에 수천만원도 벌여들었다. 도시어부 등 낚시 관련 방송만 30차례 이상 출연하며 마을 자체가 유명 관광지로 거듭나게 됐다.

그러나 반발도 많았다. 애초 마을에 터를 잡고 살던 원주민들 가운데 외지인을 마냥 반기는 사람은 드물었다. 고향의 자연자원을 바탕으로 관광 사업을 꾸리고 돈을 벌어가는 모습에 아니꼽게 보는 이도 있는 게 사실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관계 개선이 홍씨의 첫 숙제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해나기로 했다. 시작은 벽화였다. 관계가 좋은 주민들의 집 벽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선, 물고기, 해녀 등 바다를 상징하는 그림을 그려 동네 분위기를 밝게 만들려는 취지였다. 어쨌든 마을에 방문객을 늘려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천혜의 자연을 아이템으로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자는 목표였다.

깨끗한 옥화마을을 만들기 위해 해안가 청소도 직접 나섰다. 이때만 해도 마을 어르신들은 환경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음식물이라든지 일반쓰레기라든지 마구 버리곤 했다. 지금은 어르신들이 환경지킴이가 돼 서로를 감시한다.

마을 앞 해안 경계석은 무지개색으로 칠했다. 어촌계 사무실, 어구보관창고 등으로 사용하던 부둣가 컨테이너에도 맵핑해 어항 이미지를 개선했다. 차차 마을은 변했고 관광객은 부쩍 늘어났다.

마을 사람들이 점차 홍씨를 보는 눈도 달라졌고, 친분도 쌓여갔다. 어느덧 5년이 흘렀고 은근했던 텃세를 이겨내고 제대로 마을 구성원이 됐다. 수년간 배를 타며 쌓은 경험만큼 어엿한 바다 사나이 티를 내고 있었다.

마을이장님이 몸이 불편하다며 차기 이장에 나서보는 건 어떻겠느냐는 권유도 받았다. 기동성과 행정성을 두루 갖춘 젊은 사람이 더 마을에 봉사를 잘할 거라며 강권했다.

고민 끝에 홍씨는 마을이장 선거에 출마하기로 했다. 다른 후보들이 외지인에게 이장자리를 뺏길 수 없다며 ‘단일화’로 맞섰다. 단 한 표 차이였다. 홍씨는 그 때 겨우 이장이 됐지만 지금까지 4년째 마을이장을 맡고 있다.

이장이 돼서는 마을의 해묵은 사업이었던 버스 통행을 1년만에 해결했다.

또 마을브랜드로 ‘문어’를 개발해 “옥화하면 문어지”라는 이미지도 각인시켰다. 마을 내 식당, 숙박시설, 볼거리 등 안내판을 세우고 관청의 공모사업을 통해 일부 돌담집을 제외하고 마을 전체 벽화를 그렸다.

마을 내 폐가는 공용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우리 집 앞 내가 치우기 및 연 2회 바닷가 정화 등 주민들이 직접 마을 변화에 동참하게 하며 주인의식을 제고했다.

다른 공모사업으로는 해안가 산책로를 만들었다. 해안가 위를 걷는 데크를 통해 거제 앞바다를 보면 절경이다. 주말이면 이 산책로에 관광객들이 붐빈다.

자그마한 마을에 젊은이들이 수혈되면서 애초 30명 남짓하던 원주민이 귀어자 등으로 채워져 약 147명, 5배 가까이 불어났다. 홍씨가 이장이 되고 4년만에 이룬 번영이다.

이제는 강원도 등 다른 귀촌지역민들이 선진 견학까지 오는 마을이 됐다.

홍 이장은 “우리 마을에는 다문화가정도 있고, 귀어귀촌자도 있다. 원주민도 계시고, 관광객도 오신다”면서 “각자의 색을 가진 사람들이 마을에 모인다.
이들 색이 어우러져 무지개처럼 빛날 때 아름다운 마을이 될 것”이라며 “무지개같이 빛나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도시에서 귀촌해 온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재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면서 “귀촌하면 새로운 사회에 뛰어드는 만큼 낮은 자세로 배우고, 봉사에 인색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 “궁극적인 목표는 ‘할 게 없어서 배를 탄다’는 이미지를 탈피하고 어릴 때부터 꿈이 선장인 아이들이 자랄 수 있게 어업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해 보고 싶다”며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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