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노주석 칼럼] '이건희 컬렉션' 한데 모아 전시하자

노주석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5.12 18:08

수정 2021.05.12 18:08

프랑스 오르세미술관이 모델
기증자도 평소 집중을 강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노주석 칼럼] '이건희 컬렉션' 한데 모아 전시하자
개인 취향이긴 하지만 해외여행을 가면 그 도시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먼저 찾는다. 도시의 역사와 문화적 향기를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를린의 '박물관 섬'은 경이로운 공간이다. 페르가몬 등 5개 박물관이 주는 위용감이 놀랍다. 뮤지엄 패스를 끊어 사흘 동안 박물관 투어를 한 게 베를린 여행의 전부였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도시를 창건했다고들 얘기한다.
도시는 인류의 걸작이고, 도시의 정수는 박물관과 미술관에 남아 있다. 우리가 문화대국 혹은 관광대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들은 한결같이 자국 수도에 국립박물관, 근대미술관, 현대미술관 3각 체제를 갖추고 있다. 영국에는 브리티시뮤지엄과 테이트브리튼, 테이트모던이 있다. 프랑스의 경우 루브르뮤지엄, 오르세미술관, 퐁피두센터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떤가. 근대미술관이 없는 상태에서 1986년 과천국립현대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식민지배를 경험한 우리에게 근대는 다분히 잊고 싶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순서가 어긋났다. 근대의 시공간은 사장되고 흩어졌다.

최근 삼성가의 '이건희 컬렉션' 기증을 계기로 '국립근대미술관'을 설립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미술계 원로를 중심으로 컬렉션 중 근대미술품 1488점을 비롯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작품들을 한곳에 모아 상설 전시하자는 제안이다. 잃어버린 근대를 복원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건희 회장은 생전 문화재의 집중을 강조했다.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질 좋은 것들이 1억점 이상 모여있는 곳이 루브르박물관이고 대영박물관이고 미국의 스미스소니언"이라며 "만일 이들 박물관 물건을 전 국민이 서너 점씩 나눠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1997년 펴낸 에세이와 2004년 리움미술관 개관식 연설문에도 비슷한 생각이 담겼다.

안타깝게도 이건희 컬렉션의 분산은 벌써 시작됐다. 정부는 지역 미술관 5곳과 서울대 등에 연고가 있는 작품 143점을 기증했다. 기증자의 의도는 아랑곳 않았다.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작품을 기증받거나 전시관을 유치하려고 난리법석이다.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흩어지면 죽는다'는 경구를 되새겨야 할 시간이다.

박물관과 미술관이 도시경쟁력인 시대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루브르뮤지엄의 2018년 연간 방문객 수는 1000만명을 넘었다. 2000년 개관한 런던 테이트모던의 2019년 한 해 방문객은 600만명 이상이다. 브리티시뮤지엄 방문객 수와 비슷하다. 관람객의 절반은 외국인 관광객이다.

2018년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1500만명 중 대다수가 서울을 찾는 사람들이다. 선호 여행지 상위 10곳 중 7곳이 서울에 몰려 있다. 부산 해운대와 제주가 6위와 9위로 턱걸이했다. 외국인 관광객 2000만명을 유치하면 떨어지는 관광수입이 120조원이다. 외국인 관광객 눈엔 한국과 서울이 동격이다. 서울에서 더 소비하게 만드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파리의 오르세미술관처럼 서울에 초일류 명품 미술관이 필요하다. 서울의 미술관이 핵심 관광자원이 되면 한국의 품격도 저절로 올라간다.
'세기의 기증품'을 보려고 서울을 찾은 외국인이 2박3일 서울에 머문 뒤 그 정취에 빠져 지방으로 추가 여행을 떠나게 만들면 된다. 도시문화의 힘은 집중이다.
분산시키지 말고 한곳에 모아야 진정한 가치가 생긴다. joo@fnnews.com 노주석 논설위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