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의 특급논설] 기본소득, 고맙지만 사양합니다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6.07 11:04

수정 2021.06.07 11:04

박근혜정부 증세없는 복지→허구
문재인정부 소득주도성장→허구

기본·공정·안심소득은 신기루
국민연금부터 제대로 손보길

이재명 경기도 지사는 기본소득을 대선 이슈화하는데 성공했다. 이 지사와 기본소득을 비판하는 이들도 결국은 기본소득을 말해야 한다. 이 지사는 프레임 싸움에서 유리한 위치에 섰다./사진=뉴스1
이재명 경기도 지사는 기본소득을 대선 이슈화하는데 성공했다. 이 지사와 기본소득을 비판하는 이들도 결국은 기본소득을 말해야 한다. 이 지사는 프레임 싸움에서 유리한 위치에 섰다.
/사진=뉴스1


[파이낸셜뉴스] 기본소득 논쟁이 난타전으로 치닫는다. 이재명 경기 지사가 중심에 있다. 기본소득은 이 지사의 대표 상품이다. 맨 처음 꺼냈고, 지금도 줄기차게 마케팅을 하는 중이다. 또 이 지사는 내년 대선 유력주자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1, 2위를 다툰다. 선두주자는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유승민 전 의원(국민의힘)은 이재명표 기본소득을 '사기성 포퓰리즘'으로 몰아붙이면서 공정소득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기본소득을 '선심성 현금 살포'라고 깎아내리면서 안심소득을 내놨다. 같은 민주당 안에선 정세균 전 총리가 "이 지사가 주장한 기본소득은 기본 요건도 갖추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기본소득은 기본적으로 복지 정책이다. 복지를 넓히자는 데 필자는 찬성한다.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숱한 부조리의 뿌리를 캐면 부실한 복지가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지를 넓히는 정책으로 과연 기본소득이 올바른 길일까? 행여 정치인의 대선 전략에 말려 헛물만 켜는 것은 아닐까? 이러다 정작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놓치는 건 아닐까?

◇ 기본소득 논쟁의 허상

이재명표 기본소득의 얼개는 아래와 같다. 이 지사의 페이스북 글(6월5일)을 직접 인용한다.

"단기에는 예산절감으로 25조원(인당 50만원)을 확보해 25만원씩 연 2회 지급으로 기본소득 효과를 증명하고, 중기로는 기본소득의 국민공감을 전제하여 조세감면(연 50조~60조원) 축소로 25조원을 더 확보하여 분기별 지급하며, 장기로는 국민의 기본소득용 증세 동의를 전제로 탄소세, 데이터세, 로봇세, 토지세 등 각종 기본소득목적세를 점진적으로 도입 확대해가면 됩니다.

언젠가 대한민국 GDP가 3천조~4천조원대에 도달하고 국민부담률이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가 국가예산이 1천 수백조원에 이르면 1인당 월 50만원(수급자의 기초생계비 수준)의 기본소득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입니다. "

이대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쉽지 않다.

납세자들은 박근혜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가 얼마나 허술한 공약인지 지켜보았다. 박 정부는 출범 초 공약가계부를 내놨다. 세출 절감을 통해 재정의 군살을 제거하고, 비과세·감면 정비와 지하경제 양성화로 복지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목표(국민행복)는 숭고하고, 수단(증세 없는 복지)은 달콤했지만 공약가계부는 금방 엉터리로 드러났다. 꽉 짜인 예산에서 세출 절감은 헛바퀴를 돌았고, 비과세·감면 정비는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박 정부는 연말정산 방식을 바꾸고 담뱃세율을 올려 세금을 더 걷었다. 이것이 현실이다.

문재인정부는 복지 재원으로 증세와 재정을 동시에 동원했다. 정권초에 소득세율, 법인세율을 올렸다. 이어 종합부동산세율도 올렸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 국채에도 함부로 손을 대기 시작했다. 문 정부는 예산 절감이란 단어를 입밖에도 꺼내지 않는다. 비과세·감면 정비에도 함구한다. 왜? 박근혜정부에서 불가능하다는 걸 봤으니까.

이재명 지사는 전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에 적극 찬성한다. 나랏빚이 늘더라도 재정을 더 쓰자는 쪽이다. 그렇다면 납세자 입장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단기에 예산절감으로 25조원을 확보(연 2회 지급)할 수 있을까.

-중기로는 조세감면(연 50조~60조원) 축소로 25조원을 더 확보(분기별 지급)한다고 했는데 과연 현실적인가.

-언젠가 1인당 월 50만원의 기본소득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라고 했는데, 언젠가는 과연 언제인가.

유승민 전 의원(국민의힘)은 기본소득을 놓고 이재명 경기 지사와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유 전 의원은 대안으로 공정소득을 내놨다. 음의 소득세 또는 부의 소득세라고 부르는 공정소득은 일정 소득 이하 계층을 상대로 한 선별 지원이 핵심이다. 반면 이 지사의 기본소득은 전국민 보편 지원을 지향한다./사진=뉴스1
유승민 전 의원(국민의힘)은 기본소득을 놓고 이재명 경기 지사와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유 전 의원은 대안으로 공정소득을 내놨다. 음의 소득세 또는 부의 소득세라고 부르는 공정소득은 일정 소득 이하 계층을 상대로 한 선별 지원이 핵심이다. 반면 이 지사의 기본소득은 전국민 보편 지원을 지향한다./사진=뉴스1

◇공정소득, 안심소득은

유승민 전 위원은 공정소득을 내놨다. 경제학에서 '음(陰)의 소득세' 또는 '부(負)의 소득세'라고 한다. 유 전 의원의 말(6월1일 페이스북)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공정소득'(negative income tax:이하 NIT)을 도입하겠다. 공정소득은 소득이 일정액 이하인 국민들에게 부족한 소득의 일부를 지원하는 것이다…공정소득 도입을 목표로 나아가되 공정소득으로 해결 안되는 의료, 주거, 산재 등 기존 사회안전망을 병행하는 복지제도의 개혁을 추진할 것이다."

공정소득 역시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다. 공정소득을 주는 대신 기존 복지를 대부분 없애야 하기 때문이다. 유 전 의원 스스로 "기존의 사회복지를 어떻게 할 거냐"를 가장 중요한 장벽으로 꼽는다.

전직 경제관료 5인이 최근 '경제정책 어젠다 2022'라는 책을 펴냈다. 저자들은 "부의 소득세가 도입되면…소득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기존의 사회보장제도는 흡수통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구직급여, 기초연금·아동수당, 기초생활보장 생계급여 등이 대표적이다.

복지가 불가역적이라는 건 상식이다. 일단 준 건 빼앗지 못한다. 공정소득은 이같은 상식에 반한다. 생전 처음 보는 공정소득을 줄 테니 원래 받던 구직급여, 기초연금을 내놓으라고 하면 시장에서 어떤 반응이 나올까.

음의 소득세는 미국 경제학자 밀튼 프리드먼이 1960년대에 처음 제안했다. 하지만 세상 어떤 나라도 음의 소득세를 기반으로 복지제도를 설계하지 않는다. 이 또한 공정소득의 결정적인 약점이다. 기본이든 공정이든 나는 한국이 경제이론 실험실이 되는 데 반대다. 소득주도성장이 반면교사다.

오세훈 시장의 안심소득은 공정소득과 기본 틀을 공유한다. 일정 소득 이하 계층이 대상이다. "지급 단위를 개인으로 하느냐, 아니면 가구 단위로 하느냐의 차이일 뿐 제도 운용에는 크게 차이가 없다"('경제정책 어젠다 2022'). 오 시장은 지난달 하순 '안심소득 시범사업 자문단'을 출범시켰다. 신중한 진행을 당부한다.

◇국민연금부터 고쳐라

정치인들이 선전하는 별별 소득의 공통점은 뭘까. 전례가 없다, 돈이 많이 든다,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당장 급한 일도 아니다. 반면 국민연금 개혁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국민연금은 복지의 대명사다. 하지만 이름값을 못한 지 오래다.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2020년 12월 기준 노령연금 평균 수급액은 월 54만1000원이다. 용돈 연금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 마당에 소득대체율은 2008년 50%에서 해마다 0.5%포인트씩 떨어져 2028년 40%로 낮아진다. 이대로 두면 용돈연금을 면하기 어렵다. 2050년대 기금이 바닥을 드러내는 것도 시간문제다.

전국민 노후 복지용으로 만든 국민연금이 되레 복지 양극화를 부추긴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작년 9월 '국민연금제도의 사각지대 현황과 입법동향' 보고서를 냈다. 여길 보면 65세 이상 노인의 국민연금 수급률은 42.5%(2019년말)에 그친다. 또 비정규직과 자영업자의 국민연금 가입률은 40~50% 수준(2018년)에 머문다. 반면 상용 정규직 가입률은 99%를 웃돈다. 이는 고스란히 노후 복지 양극화로 이어진다. 저소득층의 연금 사각지대가 운동장처럼 넓다.

문 정부는 정권 초 국민연금에 손을 대는 시늉만 하다 포기했다. 내년 봄 대선 용꿈을 꾸는 정치인들에 당부한다. 신기루 같은 기본소득 등은 잠시 미루고 대신 국민연금부터 제대로 고쳐달라. 국민연금 사각지대만 메워도 한국 복지는 한결 좋아진다. 국민연금은 재미가 없다고? 욕 먹을 게 뻔하다고? 그런 걸 무릅쓰고 힘든 일에 손을 대야 진짜 지도자다.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장면. Waiting for Godot, text by Samuel Beckett, staging by Otomar Krejca. Avignon Festival, 1978. Rufus (Estragon) and Georges Wilson (Vladimir) / photographs by Fernand Michaud/wikipedia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장면. Waiting for Godot, text by Samuel Beckett, staging by Otomar Krejca. Avignon Festival, 1978. Rufus (Estragon) and Georges Wilson (Vladimir) / photographs by Fernand Michaud/wikipedia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는 희곡 '고도(Godot)를 기다리며'에서 인간 존재의 부조리성을 보여준다.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목을 빼고 고도를 기다린다. 소득주도성장은 영원히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린 꼴이다. 기본소득은 자칫 제2의 고도가 될 수 있다.

경제는 정직하다. 스웨덴, 핀란드 같은 북유럽 국가들은 복지천국 찬사를 받는다. 삶의 질 조사에서도 늘 선두를 다툰다. 동시에 북유럽 국가들은 세금천국이다. 이게 팩트다.


1940년 5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의회 첫 연설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피, 노고, 땀, 눈물밖에 드릴 게 없다"고 말했다. 독일과 한판 전쟁을 앞두고 환상을 심는 대신 국민의 고통분담을 호소했다.
2021년 한국 정치엔 처칠 같은 정치가(Statesman)가 보이지 않는다. 내 꿈이 너무 야무진가?

[곽인찬의 특급논설] 기본소득, 고맙지만 사양합니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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