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가족 잃고 수천만원 변호사비 물어내는 유족들 [의료소송 패소자부담, 이젠 변해야(상)]

김성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6.16 14:16

수정 2021.06.16 14:16

[의료소송 패소자부담, 이젠 변해야 1]
1990년 이후 패소자부담주의 정착
의료소송 패소시 수천만원 물어줘야
미국·일본·영국 등 재판청구권 중시해
[파이낸셜뉴스] #.복통을 호소해 응급실로 후송된 25살 딸 이연화양이 급작스레 사망했다. 아버지 이진기씨는 병원과 5년 간 소송을 벌였다. 결과는 패소였다. 대법원 패소 확정판결 직후 이씨에겐 소송비용 계산서와 최고서가 날아들었다. 병원이 소송비용으로 쓴 7620만원을 내라는 것이었다. 이씨만의 사례가 아니다.
오늘도 법원 앞엔 의료소송 끝에서 소송비용으로 수천만원을 내야 하는 유족들의 원성이 그칠 줄 모른다.


패소한 이에게 상대방의 소송비용까지 부담하도록 하는 ‘패소자부담주의’에 대한 비판이 의료소송까지 확대됐다. 공익소송과 더불어 의료소송에서도 소송비용 부담에 예외를 두자는 취지다.

전문영역인 의료소송에서 환자 유족은 약자일 수밖에 없다. 전문 지식은 물론 병원 잘못을 입증할 증거 확보에도 어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완전승소율이 1%에 불과한 의료소송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불리는 이유다.

국립병원과 대학병원 등 상급종합의료기관까지 의료소송 패소자에게 소송비용을 청구하는 세태에 비판도 쏟아진다.

의료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족이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벌여 패소한 사건에서 병원이 수천만원대 소송비용을 유족 측에 청구하는 일이 빈번하다. 법조계에선 '기울어진 운동장'인 전문영역 소송에서 환자유족에게까지 소송비용을 지우는 일이 부당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fnDB.
의료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족이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벌여 패소한 사건에서 병원이 수천만원대 소송비용을 유족 측에 청구하는 일이 빈번하다. 법조계에선 '기울어진 운동장'인 전문영역 소송에서 환자유족에게까지 소송비용을 지우는 일이 부당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fnDB.

‘해볼 만한 싸움’ 아닌 의료소송

16일 법조계에 따르면 의료소송을 하며 발생한 소송비용을 각자 부담하는 것으로 정하자는 논의가 일고 있다. 패소 시 상대 소송비용 부담으로 개인의 재판청구권이 과도하게 제약받고, 패소자에게 2차적 피해가 크다는 지적이 나오면서다.

패소자부담주의는 1990년 이후 한국사회에 자리 잡았다. 승소자가 지출한 변호사비까지 패소자에게 부담케 해 피해회복은 물론 소송남발을 방지하는 목적에서였다.

원칙이 자리 잡은 지 20여년이 흐르는 동안 패소자부담주의의 병폐도 분명해졌다. 승소율이 높지 않은 공익소송과 전문영역 소송에선 소 제기 자체를 막고 패소자에게 지나친 부담을 지운다는 것이다. 특히 환자가 병원을 상대로 벌이는 의료소송에선 패소자부담주의가 완화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의료소송에서 환자는 의료지식 부재와 인과관계 입증의 어려움으로 고전을 면치 못한다. 현행법은 병원의 잘못을 입증하는 책임을 환자 측에 지우고 있는데, 확보할 수 있는 증거 대부분을 병원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법조계에선 의료기관이 과한 소송비용을 청구하는 관행이 자리 잡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과거엔 의료사고 피해자나 유족이 의료기관에 소송을 냈다 패소해도 의료기관이 유족의 상처 등을 고려해 소송비용을 청구하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지만 최근 들어 경향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실제 본지가 확보한 사례 3건에서 굴지의 상급종합병원이 최근 유족에게 소송비용을 즉각 청구한 것이 확인되기도 했다.

딸을 잃고 소송에서까지 패소한 이진기씨는 “하루아침에 건강하던 딸이 죽은 상황이 너무나 억울해 소를 제기한 건데 소송비용 수천만원까지 물어내라니 잠을 잘 수 없을 지경”이라며 “일반인이 의료과실을 입증하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인데 패소한 책임을 이렇게 큰 돈으로 물게한다면 누가 감히 병원에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겠나”하고 호소했다.

일부 병원은 강제집행을 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소송비용이 확정된 패소자가 비용을 지급하지 않겠다고 버티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을 가까이서 본 환자들 사이에선 ‘의료소송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란 자조 섞인 발언까지 나온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패소자가 보전해야 하는 소송비용에 변호사비를 포함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남소가 제기된다는 비판도 있지만, 약자가 패소가 두려워 소제기를 아예 하지 못하는 사례가 줄어든다는 평가다. fnDB.
미국 연방대법원은 패소자가 보전해야 하는 소송비용에 변호사비를 포함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남소가 제기된다는 비판도 있지만, 약자가 패소가 두려워 소제기를 아예 하지 못하는 사례가 줄어든다는 평가다. fnDB.

재판청구권, 소송비용보다 중요해

외국은 어떨까. 미국은 변호사비용을 소송비용에 포함하지 않는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소송의 결과는 불확실성을 갖고 있고, 이에 따라 당사자들이 단순히 소송을 방어하거나 제기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 받아서는 안 된다”며 “그런 처벌이 상대방 변호사 비용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소를 제기하는 것을 억제당하는 결과로 나타난다”고 판시했다.

재판청구권이 소송비용 보전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 역시 변호사비 각자부담이 원칙이다.

반면 영국은 패소자부담주의를 취한다. 다만 해당 제도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법률구조제도나 법률비용보험제도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또 소송비용을 패소자에게 부담시킬 것인지, 또 그 액수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에 대해 법원의 재량을 인정한다.

한국에서도 의료소송에서 패소자부담주의를 완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다. 관련 논의를 이끌어온 박호균 변호사(법무법인 히포크라테스)는 “한국의 민사소송법은 의료사고 피해자의 재판청구권을 심각하게 제약하는 문제점이 있다”며 “소송비용으로 괴롭히는 이런 후진적인 제도는 하루빨리 개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의료소송에서 대형병원, 국립대병원에서 본인들이 지출한 변호사 보수를 패소한 환자 측에 청구하는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며 “이제는 개선돼야 할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jihwan@fnnews.com 김지환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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