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노주석 칼럼] 여군을 위한 나라는 없는가

노주석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6.16 18:00

수정 2021.06.16 18:00

공군 이 중사 사건에 국민 분노
군내 남성우위 사고방식 여전
이참에 불편한 진실 다 밝혀야
[노주석 칼럼] 여군을 위한 나라는 없는가
지난해 6월 미국 텍사스 포트후드 기지에서 근무하던 여군 바네사 기옌 일병 사망사건은 공군 이 중사 성추행 사망사건과 판박이다. 성폭행 범인은 상관 아론 로빈슨 상병이었다. 성범죄를 당해도 보복이 두려워 신고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지휘계통을 통한 보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누락된 사실도 드러났다. 지난해 미군 성범죄 피해자는 2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 국방부는 지휘관에게서 기소권을 분리하는 군 개혁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군내 성폭력의 흑역사는 뿌리 깊다. 30년 전 발생한 미국의 테일후크 스캔들을 꺼내 보자. 1991년 걸프전 승리에 들뜬 해군 조종사들이 친목행사에서 만취, 남성 7명과 여성 83명을 집단으로 성추행·성폭행했다. 이 사건으로 14명의 제독과 300명의 장교가 옷을 벗었다. 조종사 140명은 징계위에 회부됐다. 5000명 이상의 장교 진급이 보류됐다. 그러나 이게 끝이었다. 형사처벌자는 0명이었다. 30년 전 미국은 실기했다.

여군을 위한 나라는 없는가. 전 세계 여군이 성희롱·성추행·성폭력 몸살을 앓고 있다. 2014년 프랑스에서 군내에 성범죄 실태를 폭로한 책이 발간된 이후 대대적인 내부조사가 이뤄졌다. 성폭행 사례 86건이 사실로 밝혀졌다. 2015년 캐나다는 캐나다군이 성범죄에 오염돼 있다고 인정했다. 2020년 1542건의 성폭력 민원이 접수된 이스라엘도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여군들은 남성 중심의 군대문화 속에서 고립감과 업무배제에 따른 두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여군을 성가시고 불편한 존재로 보는 남성우위 사고방식도 여전하다. 여군이 없었으면 성범죄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여군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분위기다. 우리 군은 인권과 사법권 위에 부대장의 지휘권이 왕처럼 군림해왔다.

군대의 생명은 보고다. 이 중사 사망 당시 제대로 기능하지 않은 군 사법제도가 문제다. 지휘체계, 공군 양성평등센터, 군 수사단계 등 세 보고단계 모두 작동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 군의 생리를 아는 사람들은 한통속 군법무관 조직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군검사, 군판사, 국선변호장교(군 국선변호사) 모두 군사훈련 동기생에다 법무병과에 소속돼 평가를 받고,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며, 순환보직하는 가족적 구조를 갖고 있다.

이 중사 사건을 계기로 군 사법체계를 개조하자는 군사법원법 개정안이 쏟아지고 있다. 부대장의 지휘권을 포기하고, 평시 군사재판 항소심 관할을 민간법원인 서울고법으로 이관하겠다며 국방부가 지난해 발의한 정부안을 깔아뭉갠 국회의 늑장이 가장 큰 실책이다. 평시 군 사법권을 민간으로 가져올 때가 됐다. 군 스스로 심판하고 개혁할 시간은 흘러가 버렸다.


쿠바의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에서 일어난 실제 구타 사망사건을 영화화한 롭 라이너 감독의 1992년작 '어 퓨 굿맨'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신참 군법무관 대니얼 캐피 해군 중위(톰 크루즈)의 법정 추궁에 흥분한 기지 사령관 네이선 제섭 대령(잭 니컬슨)의 "넌 진실을 감당할 수 없어!(You can't handle the truth)"라는 대사는 진실의 극단적 양면을 보여준다.
불행한 사건이 또 발생하지 않으려면 이참에 불편한 진실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야 한다.

joo@fnnews.com 노주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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