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너무 억울했지만… 수천만원 소송비 걱정에 병원과 합의" [소송비용 패소자 부담주의, 이젠 변해야]

김지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6.17 17:59

수정 2021.06.17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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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사고 입증책임·비용 압박에
訴 포기하거나 어쩔수없이 합의
의료소송 법체계 개선 한목소리
"너무 억울했지만… 수천만원 소송비 걱정에 병원과 합의" [소송비용 패소자 부담주의, 이젠 변해야]

#. 응급 수술 뒤 어머니가 사망했다. A씨는 병원과 3년여 간 소송전을 벌였다. 결과는 1심과 2심 모두 패소였다. 이후 A씨에게 1850여만원 상당의 소송비용 확정 결정문이 날아왔다. 병원이 지불한 변호사보수와 감정료, 송달료 등이다. A씨는 장시간 소송으로 형편이 어려워져 납부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어머니가 사망한 병원에 '화해요청서'를 보내야 했다.

의료분쟁에서 입증의 어려움과 소송비 부담에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병원과 합의하는 사례가 잇따른다. 의료과실을 따질만한 사안임에도 환자들이 소송을 포기하고 저자세로 합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통상 합의안엔 비밀유지 조항과 함께 억대 위약금이 명시된다. 유사 사고가 이어져도 공론화하기가 쉽지 않다. 판례 역시 남지 않는다. 병원을 찾는 다른 환자들은 병원에서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재판까지 5년 훌쩍, 지면 패가망신

17일 법조계와 시민사회단체 등에 따르면 패소자부담제도와 입증책임을 원고 측에 지우는 현행법체계가 낳는 부작용이 심각하다. 의료소송의 어려움을 우려해 떠밀리다시피 개별합의에 이르는 사례가 많다는 평가다.

수년 전 성형수술을 받다 중태에 빠져 숨진 B양의 부모도 병원과 합의를 봤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B양이 서울까지 가서 수술을 받았는데 끝내 깨어나지 못한 것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유족이 병원에 항의를 해보았지만 유족 입장에선 증거 하나 확보하기가 별따기였다.

B씨는 결국 병원이 제시한 합의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수년에 걸친 소송과 패소할 수도 있다는 불안, 병원 소송비용 수천만원 물어줄 수 있다는 부담은 B씨가 합의에 이르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유방암 오진으로 멀쩡한 가슴 한쪽을 절제한 C씨 사례도 마찬가지다. 30대 중반 C씨는 종합병원 급 의료기관에서 유방암 진단을 받고 가슴을 절제했는데, 절제한 부위에서 암세포가 나오지 않았다.

C씨와 부모의 항의에 담당 의사가 처음 사과를 했지만 이내 병원 책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을 바꿨다. 병원은 소송 돌입 시 변호사비가 얼마나 들지, 기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등을 언급하며 C씨를 압박하기도 했다.

C씨는 억울했지만 병원이 제시한 재건수술과 수술비 일부 환급에 만족하고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과 합의를 고민한 의료사고 피해자들은 소송에 대한 압박감을 숨기지 않는다. 특히 의료소송을 진행한 이들이 패소 뒤 병원 측 변호사 비용을 상당부분 감내해야 한다는 데 큰 부담감을 토로한다.

■"의료소송 법체계 개선 필요"

어머니 사망 뒤 병원과 의료소송을 진행 중인 D씨는 병원이 꾸린 변호인단을 보고 부담이 커졌다고 했다. D씨는 "나도 의료소송 전문변호사를 써야 하니 부담이 큰데 병원은 정말 유명한 사람들이 변호를 하더라"라며 "나중에 패소하면 그 비용을 다 물어줘야 한다니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시민사회단체에선 의료소송을 둘러싼 법체계가 개선돼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진다.

이나금 의료정의실천연대 대표는 "의료소송은 모든 입증자료를 의료진이 가졌는데도 입증책임은 피해자가 지는 기형적 구조인데 패소하면 상대편 변호사 비용까지 물어줘야 하니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라며 "지금 구조에선 패소자부담주의가 가혹하니 구조를 바꾸건 패소자 부담을 줄여주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조계 내에서 관련 논의를 주도해 온 박호균 변호사(법무법인 히포크라테스) 역시 "한국 법이 패소자부담 원칙으로 일률적으로 변경된 건 과거 군사정부 시절인데, 당시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이 반영되지 못했다"며 "사회적 약자는 대기업, 국가 등을 상대로 하는 소송을 주저할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소송을 통한 문제제기와 이를 통한 비판과 견제를 억제하는 불합리한 점이 있다"고 비판했다.

jihwan@fnnews.com 김지환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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