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의 특급논설] 더 솔직한 후보 어디 없나요?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6.20 16:19

수정 2021.07.01 12:36

대선 앞두고 아무말 대잔치
너나없이 달콤한 말 속삭여

'피와 눈물' 명연설 남긴 처칠
고통분담 호소가 진정한 용기
우리 정치엔 왜 이런 사람 없나

청년실업은 한국 사회가 풀어야 할 고질병 중 하나다. 그러나 청년수당, 취업지원금 등 정부와 정치권이 내놓은 처방은 대증요법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기업·공기업 정규직 노조가 누리는 기득권은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성역이 됐다. /사진=뉴스1
청년실업은 한국 사회가 풀어야 할 고질병 중 하나다. 그러나 청년수당, 취업지원금 등 정부와 정치권이 내놓은 처방은 대증요법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기업·공기업 정규직 노조가 누리는 기득권은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성역이 됐다.
/사진=뉴스1


[파이낸셜뉴스]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서 농부 네모리노는 부잣집 아가씨 아디나를 짝사랑합니다. 물론 아디나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지요. 상심한 네모리노 앞에 떠돌이 약장수가 나타납니다. 네모리노는 서둘러 사랑의 묘약을 사서 마십니다. 사실 싸구려 포도주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네모리노는 아디나의 사랑을 얻고 오페라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습니다.

뜬금없이 무슨 오페라 이야기냐구요? 한국 정치를 보면 자꾸 묘약이 떠올라서 그렇습니다. 우리 정치인들은 너나없이 고질병을 한 방에 치유할 묘약이 있다고 유권자를 유혹합니다. 어떤 이는 기본소득을 말하고, 또 어떤 이들은 공정소득, 안심소득을 말합니다. 국민자산 5억 성공시대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이도 있고, 비정규직 임금 우대제를 공약으로 내세운 이도 보입니다. 출산하면 4년 간 월 40만원을 준다는 말도 들리네요. '누구나집' 주택혁명을 통해 "거짓말 같은 일이 현실로 나타날 것"이라고 장담하는 이도 있구요. 말만 들어도 배가 부릅니다.

내년 봄 용꿈을 꾸는 이들에게 제갈량의 출사표 이야기를 들려줄까 합니다. 223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800년 전에 제갈량은 유비의 아들 유선에게 위(魏)나라를 치겠다며 출사표를 냅니다. 그러나 북벌은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하필이면 제갈량이 아끼던 부하 마속이 지시를 어기는 바람에 패전을 재촉합니다. 공명은 패전 책임을 물어 스스로 승상직에서 물러나고, 울면서 마속의 목을 베지요.

출사표는 아무나 내는 게 아닙니다. 출마를 선언하는 순간 대선 후보는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희생없이 고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떠벌리는 사람은 사실 약장수와 다를 바 없어요. 소득주도성장을 보세요. 소득도 늘고 성장도 하는 요술은 경제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경제는 정직합니다. 땀 흘린 만큼 거두게 마련입니다.

더 솔직히 말해 볼까요. 정치인들의 가벼운 구호보다 광주에서 커피 자영업을 하는 배훈천씨의 묵직한 호소가 더 마음을 울립니다. 왜 그럴까요? 후보들은 공중에 붕 떠 있고, 배훈천씨는 땅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배훈천씨 주장에 100%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울) 강남이란 구름 위에서만 사는 자들이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오손도손 살고 있는 자영업과 서민들의 생태계를 순식간에 망가뜨렸다"는 대목엔 격렬하게 공감합니다.

대선은 아직 예선도 안 치렀습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주자들의 정책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트집 잡는 건 성급할 수도 있지요. 다만 저같은 중도파 유권자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는지 미리 말해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경제 분야 가상의 출사표를 써봤어요. 저는 이런 출사표를 쓴 후보에게 높은 점수를 줄 겁니다.

참,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서 왜 아디나가 네모리노와 사랑에 빠지는지 아세요? 엉터리 묘약이 효능을 발휘해서? 아닙니다. 아디나가 네모리노의 진실한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진심이야말로 으뜸 묘약입니다.

증세 없는 복지는 한계가 뚜렷하다. 증세를 피해 국채에 의존하는 복지는 나라살림을 망가뜨리기 십상이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증세는 금기어다. © News1 김일환 디자이너 /사진=뉴스1
증세 없는 복지는 한계가 뚜렷하다. 증세를 피해 국채에 의존하는 복지는 나라살림을 망가뜨리기 십상이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증세는 금기어다. © News1 김일환 디자이너 /사진=뉴스1


<가상의 출사표>

"유권자 여러분, 감언이설로 여러분을 꼬드기는 후보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욕을 먹더라도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첫째, 기본소득, 공정소득, 안심소득 하지 않겠습니다.
○○소득은 다 세금입니다. 납세자 돈 걷어서 마치 제 돈인 양 인심 쓰는 비양심적인 행위는 하지 않겠습니다.

둘째, 노동시장 이중구조 바꾸겠습니다.
대기업·공기업 정규직 노조는 쾌적한 성(城) 안에서 좋은 일자리를 꿰찼습니다. 청년과 비정규직은 성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이제 성 문을 열어야 합니다. 서로 드나들 수 있도록 길을 터야 합니다. 그래야 청년, 비정규직이 숨을 쉽니다. 청년특임장관 없어서 청년이 힘든 게 아닙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청년을 힘들게 합니다.

셋째, 납세자 모두가 참여하는 보편 증세하겠습니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입니다. 소주성, 기본소득처럼 검증 안 된 이론 대신 스웨덴 같은 나라에서 입증된 북유럽 복지를 모델로 삼겠습니다. 증세는 정치인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넷째, 부동산 정치를 하지 않겠습니다.
부동산과 전쟁, 이런 말 쓰지 않겠습니다. 좋은 집에 살고 싶은 소박한 꿈을 존중하겠습니다. 부동산은 정치가 아니라 경제라는 점을 명심하겠습니다.

다섯째, 원천기술 강국의 씨를 뿌리겠습니다.
코로나 백신 때문에 얼마나 애를 먹었습니까. 원천기술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디 백신뿐입니까? 우린 물건은 잘 만들지만 기초기술은 아직 멀었습니다. 지금 씨를 뿌려도 언제 열매를 맺을지 모릅니다. 저는 우공이산의 심정으로 씨를 뿌리겠습니다.


유권자 여러분,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1940년 5월 첫 의회 연설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피, 노고, 땀, 눈물밖에 드릴 게 없다'고 말했습니다. 독일과 한판 전쟁을 앞두고 환상을 심는 대신 국민의 고통분담을 호소했습니다.
미안합니다만 저도 여러분에게 피와 노고, 땀, 눈물 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

[곽인찬의 특급논설] 더 솔직한 후보 어디 없나요?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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