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정치

[수출규제 2년] 日 반도체 재건 외치며 부활 노리는 아베, 2년전 韓 수출규제 '본색' 드러나다 [글로벌 리포트]

조은효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6.20 18:08

수정 2021.06.20 18:19

옛 영광 '일장기 반도체' 되찾겠다며
일본 정부 국가적 사업으로까지 띄워
경제산업성, 해외기업 유치 등 총력
아베 前 총리와 정치적 맹우들 뭉쳐
"반도체 지배해야 세계 제패" 역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로이터 뉴스1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로이터 뉴스1

【파이낸셜뉴스 도쿄=조은효 특파원】 지난 2019년 일본 정부가 한국의 주력산업인 반도체 소재 등에 대한 수출규제를 가한 지 꼭 2년, 당시 주역이었던 아베 신조 전 총리와 주무부처인 일본 경제산업성이 최근 '일장기 반도체의 부활'에 시동을 걸고 있어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일장기 반도체'는 과거 1980년대, 세계시장 점유율 50%대로 1위를 달렸던 일본 반도체 산업의 위용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중 반도체 공급망 대결구도 속에서 일본 반도체 산업이 설 자리를 잃고, 국내 수요조차 안정적으로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란 위기감이 양측을 중심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아베 전 총리와 경산성의 합작품이었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역시 세계적 조류에서 이탈해 가는 일본 반도체 산업에 대한 위기감, 한·일 반도체 산업 역전에 대한 불만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음이 재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수출규제 2년] 日 반도체 재건 외치며 부활 노리는 아베, 2년전 韓 수출규제 '본색' 드러나다 [글로벌 리포트]

40년 만에 이제는 옛말이 된 '일장기 반도체'를 재건하겠다며 '국가적 사업'으로까지 띄운 상태다. 이 '부활작전'에는 지난해 총리직에서 물러난 아베 전 총리의 정치적 부활과도 맞물려있다는 게 일본 정가의 지배적 해석이다.
막대한 자금과 첨단기술 확보가 요구되는 세계 반도체 전쟁에 뛰어들겠다는 일본, 일본 반도체 산업도, 아베도 함께 부활할 수 있을지 그 실현 가능성에 관심이 모아진다.

아베, 반도체로 정치적 승부수 띄워

"일개 산업정책이 아닌 국가전략으로 삼아야 한다." 지난달 21일 한국의 여의도 격인 일본 도쿄 나카타초의 자민당 본부. 아베 전 일본 총리가 그의 정치적 맹우들인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 아마리 아키라 자민당 세제조사회장과 함께 반도체 전략 추진 의원연맹 설립 총회를 열어 경제안보 차원에서 일본 반도체 산업을 재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베·아소·아마리, 일본 정가에서는 이 세 사람의 이름 앞글자를 따 이른바 '스리 에이(3A)'라고 부른다. 지난 2012년 정권 탈환 후부터 아소 부총리는 줄곧 재무상을, 아마리 회장은 '아베노믹스'의 사령탑인 경제재생 담당상(장관)을 지냈다.

이날의 '스리 에이'는 "반도체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제패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도체 산업의 재팬 애즈 넘버 원, 어겐(Japan as No.1, again, 다시 한 번 세계 최고 일본을)"을 역설했다. 반도체 제조공정 등에 들어가는 소재로 한국 반도체 산업을 겨냥했던 아베 전 총리가 꼭 2년 만에 일본 반도체 부활을 외치며, 자민당의 반도체 사령탑으로 복귀한 것이다.

일본 정가에서는 아베 전 총리가 반도체 전략추진 의원연맹을 구심점으로 정치적 부활을 노리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일본 자민당의 '킹 메이커'이자 친중파인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과 그가 이끄는 니카이파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반도체 이슈를 선점, 당내 구심점을 회복을 노리고 있다는 얘기다.

아베 전 총리는 경제정책의 뼈대라는 뜻에서 일명 '호네부토 방침'로 불리는 일본 정부의 경제재정 운영지침(기획재정부의 경제정책방향 격)에 반도체 산업 재건에 대한 의지를 반영시키겠다고 했고, 이 공언은 지난 18일 그대로 이뤄졌다. 이날 각의(국무회의)를 통과한 스가 내각의 첫 호네부토 방침에는 경제안보 항목이 새롭게 추가되고, 그 핵심으로 반도체 산업을 국가전략으로 추진할 것이란 내용이 명기됐다.

일본 경제산업성. AP뉴시스
일본 경제산업성. AP뉴시스

■ 日경산성, 해외기업 유치 골몰

아베 전 총리와 한국에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로 손발을 맞췄던 일본 경산성도 올 초부터 반도체 재건정책 수립에 속도를 높였다. 지난 3월 '반도체·디지털 산업 전략검토회의'를 설치한 데 이어 약 3개월 만인 이달 4일 '반도체·디지털 산업전략'을 발표했다.

총 110여쪽 분량의 이 문건에는 일본 반도체 산업이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 30년'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통렬한 반성과 향후 일본 내 반도체 생산라인 구축, 차세대 반도체기술 확보 등의 목표와 대응 방식이 빼곡히 정리돼 있다. 이 문건을 한 줄로 요약하면 "해외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의 일본 내 공장 유치, 해외기업과 협력해 첨단 시스템 반도체 기술 확보"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이달 초 발표한 반도체 디지털 산업전략. 사진=조은효 특파원
일본 경제산업성이 이달 초 발표한 반도체 디지털 산업전략. 사진=조은효 특파원

한국, 미국, 대만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5~10㎚(나노미터, 1㎚는 10억분의 1m) 하이엔드 시장에서 달려나가고 있으나, 일본 국내 업체들은 여전히 40㎚ 안팎에 머물러있다. 이 격차를 좁히는 속성코스를 해외기업 유치라고 본 것이다.

사실 경산성의 해외 파운드리 유치 노력은 이미 2019년 여름께부터 움직임이 있었다. 한 손으로는 한국 삼성전자 등에 수출규제를 가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대만의 TSMC를 향해 구애 손짓을 한 사실이 최근 뒤늦게 밝혀졌다. 일본 정부는 TMSC와 반도체 후공정 연구시설 유치 합의에 이어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에 첨단 반도체 공장 설립건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실현 가능성과 실익은

일본 정부가 공식 문서에 국가전략으로 반도체 산업 추진하겠다고 명시했으니, 이미 시위가 당겨진 셈이다. 반도체 산업은 공장 1건당 약 10조원이 투입되는 고비용 산업이다. 막대한 비용을 투입해 반도체 산업을 재건했을 때 일본 산업계가 얻을 실익이 있겠느냐. 이에 대해선 사실 회의적 시각이 많다.

첫째, 일본 내에 반도체를 사줄 '큰 고객'이 없다는 점, 즉 구매처의 문제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반도체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곳은 스마트폰, PC 등인데 소니 휴대폰이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자취를 감춰가고 있는 상황에서, 반도체를 사줄 큰 고객이 일본 내 없는 상황에서 굳이 막대한 비용들 들여 생산라인을 구축한다 한들 과연 무슨 실익이 있겠느냐"고 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공급난을 겪고 있는 차량용 반도체가 문제라면 그 분야에서 세계 2~3위를 다투는 일본의 르네사스 테크놀로지스를 더 키우면 될 노릇인데, 글로벌 첨단 시스템반도체 경쟁에 뛰어드는 것은 경제적 관점보다는 정치적 구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둘째, 반도체 산업이 기본적으로 고비용 산업인데 여기에 전기요금, 임금 등 일본 사회의 고비용 구조까지 가세하면 과연 채산성이 나오겠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일본에는 미국 인텔 등과 같은 대규모 팹리스(설계회사)가 없다. 설계, 파운드리(생산), 패키징(포장) 등 전 영역에 걸쳐 첨단기술 확보를 위해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오노 도시히코 이노테크 회장(전 후지쓰 부사장)은 최근 일본판 이코노미스트지에 일본에 미국과 같은 유력 팹리스(설계회사)가 없는 상황에서 "일본 국내 파운드리 구상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라며 과거 2000년께 이미 일본 국내 파운드리 구상이 추진된 바 있으나 히타치제작소, 도시바 등이 각사가 갖고 있던 설계 자산을 내놓지 않아 무산됐던 경험을 언급했다.

지진 등 자연재해 리스크도 감안해야 한다.
이미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르네사스 공장(이바라키현)이 멈춰서는 바람에 일본 자동차 업계에선 '르네사스 충격'을 경험한 바 있다.

경제산업성이 반도체·디지털 산업전략을 발표한 다음 날 아사히신문은 이런 지적을 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일본이 시스템 반도체 생산기술 지체를 만회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면서 "무조건 일본 국내에서 생산하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경제적 합리성 검토가 소홀해져서는 곤란하다"고 꼬집었다 .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