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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기름 대란' 멈춰선 영국…주유소 3곳 줄줄이 허탕

기사내용 요약
주유소마다 "기름 없음" 안내…간신히 찾은 곳은 차량 행렬
트럭 운전사 부족 탓…"운전할 수 있으면 내일이라도 일 나와라"
슈퍼마켓 생필품 매대도 불안…언론이 사태 부추겨 비판도

[런던=뉴시스]이지예 기자 =30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욱스브리지의 한 주유소 주유기에 주유 불가 안내가 붙어 있다. 2021.9.30. *재판매 및 DB 금지
[런던=뉴시스]이지예 기자 =30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욱스브리지의 한 주유소 주유기에 주유 불가 안내가 붙어 있다. 2021.9.30. *재판매 및 DB 금지
[런던=뉴시스]이지예 기자 = '죄송하지만 사용 불가입니다'(Sorry out of use· 쏘리 아웃 오브 유즈)

지난 9월 30일 오전(현지시간) 주유소 3곳에서 차에 기름을 넣으려 했지만 줄줄이 허탕을 쳤다. 주유소마다 기름이 동났음을 알리는 안내문만 덩그러니 차량을 반겼다.

기자가 주유를 시도한 곳은 런던 서부의 욱스브리지. 평범한 영국인들이 모여사는 지역이자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의 지역구이기도 하다. 영국 전역에서 심각한 주유 대란이 빚어지고 있는 요즘 이 곳도 난리를 피하지 못했다.

기름이 떨어진 주유소들은 안전 고깔이나 철제 구조물로 아예 주유기 근처로 차량이 진입하지 못하게 막아놨다. 주유기마다 사용 불가 문구가 박힌 샛노란 안내문이 붙었고, 일부는 비닐봉지로 파이프를 꽁꽁 감싸놓았다.

[런던=뉴시스]이지예 기자=30일(현지시간) 런던 서부 욱스브리지의 한 주유소가 안전 고깔과 구조물로 차량 진입을 통제하고 있다. 2021.9.30. *재판매 및 DB 금지
[런던=뉴시스]이지예 기자=30일(현지시간) 런던 서부 욱스브리지의 한 주유소가 안전 고깔과 구조물로 차량 진입을 통제하고 있다. 2021.9.30. *재판매 및 DB 금지
기름을 넣으러 주유소에 들어온 차들은 주유 불가 안내를 보고 대부분 정차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빠져나갔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끊임없이 텅빈 주유소로 밀려드는 차량들에서 조바심이 느껴졌다.

한 주민은 "기름이 거의 다 떨어져서 다음주에는 자전거를 타고 출근해야 할 수도 있다"며 "다 같이 사재기를 하지 않으면 아무 문제도 없을 텐데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결국 이날 오전 주유에는 실패했다.

영국의 주유 대란은 벌써 일주일째 이어지고 있다. 그랜트 섑스 교통장관은 "연료 부족은 없다"며 '패닉바잉'(공포 구매)을 멈추라고 수차례 호소했다. 그러나 생필품인 기름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일반인들 불안감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런던 시내를 돌아봤지만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시 중심부 패딩턴의 한 주유소에도 어김없이 '쏘리 아웃 오브 유즈' 사인이 붙어 있었다. 기름을 넣으려 입구에 줄을 선 차량은 없는데 출구 쪽만 아무 수확없이 빠져나가려는 차들로 붐볐다.

[런던=뉴시스]이지예 기자=30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세인트 존스 우드의 한 주유소 앞에 기름을 넣으려는 차량이 길게 늘어서 있다. 사진 왼쪽 가로수를 따라 길가에 서 있는 차량 모두 주유소 진입을 대기 중이다. 2021.9.30. *재판매 및 DB 금지
[런던=뉴시스]이지예 기자=30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세인트 존스 우드의 한 주유소 앞에 기름을 넣으려는 차량이 길게 늘어서 있다. 사진 왼쪽 가로수를 따라 길가에 서 있는 차량 모두 주유소 진입을 대기 중이다. 2021.9.30. *재판매 및 DB 금지

[런던=뉴시스]이지예 기자=30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세인트 존스 우드의 한 주유소 앞에 기름을 넣으려는 차량이 길게 늘어서 있다. 2021.9.30. *재판매 및 DB 금지
[런던=뉴시스]이지예 기자=30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세인트 존스 우드의 한 주유소 앞에 기름을 넣으려는 차량이 길게 늘어서 있다. 2021.9.30. *재판매 및 DB 금지
런던 북부 세인즈 존스 우드 지역에서 간신히 주유가 가능한 주유소를 발견했다. 하지만 기름을 넣으려 몰린 차량 행렬이 주유소 앞 도로 끝까지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형광색 조끼를 입은 경비가 진입 차량들을 안내하느라 홀로 분주했다.

주유에 시간이 걸리다보니 줄은 자꾸만 길어졌다. 한데 몰린 차량들로 일대에 극심한 교통 체증이 빚어지면서 소란스러운 경적이 반복해서 울렸다. 차에서 내려 앞에 줄선 차량과 언쟁을 벌이는 사람도 보였다. 몇몇 행인들이 멈춰 서서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수근거렸다.

운송 업계에 종사하는 기자의 한 지인은 이번 사태를 놓고 "기름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화물 운송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며 "(트럭 운전을 할 수 있다면) 당장 내일부터라도 일하러 나와도 좋다"고 말했다.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런던=뉴시스]이지예 기자=30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시내 패딩턴 인근의 주유소가 기름이 떨어지자 주유기 파이프를 비닐봉지로 감아놨다. 2021.9.30. *재판매 및 DB 금지
[런던=뉴시스]이지예 기자=30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시내 패딩턴 인근의 주유소가 기름이 떨어지자 주유기 파이프를 비닐봉지로 감아놨다. 2021.9.30. *재판매 및 DB 금지
영국의 주유 대란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와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물건을 운송할 외국인 트럭 운전사가 줄어든 데 원인이 있다. 최근 코로나19 봉쇄가 완전히 풀리면서 이동이나 상품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점도 혼란에 한몫했다.

영국 정유업체 BP는 성명을 통해 "일부 소매점에서 연료 공급 문제를 겪고 있다. 자격을 갖춘 운전자 부족으로 인한 공급망 지연 때문"이라고 밝혔다. 주유소를 운영하는 유통업체 테스코는 "연료 가용성은 괜찮으며 전국 주유소에 규칙적인 배송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영국의 트럭 운송 산업은 중· 동유럽 등 EU 회원국 출신 운전사들에 크게 의존해 왔다. 영국 정부는 작년 브렉시트 이후 이민 문턱을 높이면서 외국인 노동자 정책도 한층 강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가 발발하자 외국인 운전사 이탈은 더욱 심각해졌다. 영국은 현재 트럭 운전사 10만 명이 부족한 상황이다.

[런던=AP/뉴시스]영국 런던의 한 슈퍼마켓 음료수 진열대가 텅 비어 있다. 2021.9.30.
[런던=AP/뉴시스]영국 런던의 한 슈퍼마켓 음료수 진열대가 텅 비어 있다. 2021.9.30.
문제는 영국에서 이런 공급망 대란이 연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부 슈퍼마켓에서 고기, 채소, 음료수 등 주요 품목이 매대에서 품절됐다는 보도가 빈번하게 나오고 있다. 영국 식품음료협회(FDF)는 노동력 부족으로 인해 그때 그때 필요한 만큼의 물건을 공급해 판매하는 '적시 공급 방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한 기름 운송과 외국인 운전사 임시비자 발급을 추진하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영국 내 직업 교육과 처우 개선으로 국내 노동력 활용도를 높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브렉시트 이후 노동력 부족은 이미 예고된 문제였던 만큼 정부의 늑장 대응이 혼란을 키웠다는 원성이 높다.

다만 이런 혼란 속에서도 영국의 일상이 마비된 건 아니다.
코로나19 봉쇄가 풀린 덕에 도로는 여전히 차들로 붐비고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정상 운행하고 있다. 마트에서 일부 품목이 동나더라도 이런 상황이 장기화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 때문에 현지인들 사이에선 언론과 소셜미디어가 사태를 부풀려 불안을 부추긴다는 의견도 많다.

[런던=AP/뉴시스]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런던=AP/뉴시스]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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