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합창'으로 긍정의 삶 찾은 청각장애 중학생…"함께 노래하며 변했어요"

뉴스1

입력 2021.10.03 08:00

수정 2021.10.03 08:00

28일 자택에서 기자와 인터뷰 하는 정한기군(15) 모습. © 뉴스1(파라다이스 복지재단)
28일 자택에서 기자와 인터뷰 하는 정한기군(15) 모습. © 뉴스1(파라다이스 복지재단)


한기군이 참여한 '아이소리앙상블' 공연 포스터. © 뉴스1(한기군 어머니 제공)
한기군이 참여한 '아이소리앙상블' 공연 포스터. © 뉴스1(한기군 어머니 제공)


노래하는 한기군 모습(왼쪽에서 세번째) © 뉴스1(한기군 어머니 제공)
노래하는 한기군 모습(왼쪽에서 세번째) © 뉴스1(한기군 어머니 제공)


[편집자주]중독과 상처, 고통에서 회복돼 다시 출발한 사람들의 드라마, '회복자들'을 만났습니다. 삶의 끝에 내몰린 절망을 희망으로 이겨낸 우리 이웃들입니다.

(서울=뉴스1) 강수련 기자 = 청각장애를 갖고 태어난 정한기 군(15)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친구들이 말을 걸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교류가 적었다.

그러나 엄마 손에 이끌려 간 합창단 '아이소리앙상블'에서 한기 군은 서서히 변했다. 아이소리앙상블은 파라다이스 복지재단이 2009년 창단해 지원하는 세계최초 청각장애아동 합창단이다.


남들은 못한다고 했지만 한기 군은 노래를 배우고, 연기 연습을 하고, 다른 청각장애 아동들과 합을 맞췄다. 6년간의 과정을 통해 한기 군은 자신을 가뒀던 '알'을 깨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아이로 다시 태어났다.

지난 25일 서울 동작구 자택에서 한기 군을 만났다.

◇합창단, 변화의 시작

한기 군은 태어나자마자 보청기를 껴야 했다. 열차가 통과할 때 주변에서 나는 소음 수준인 100 데시벨(db) 아래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 자라면서 '기적처럼' 조금씩 청각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5급 청각장애를 갖고 있다.

한기 군이 노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 건 6살 때였다. 그의 어머니 조미영씨는 형을 따라 노래 부르는 한기 군의 모습에서 희망을 봤다.

9살때 엄마의 손을 잡고 따라간 합창단. 학교 친구들과 가족 외에 타인과 소통할 일이 없었던 한기 군에게 7~16세 장애아동 20명이 함께 무대를 꾸려야 하는 합창단은 낯선 곳이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다른 일정을 포기하고 합창단에 갔다. 선생님들에게 뮤지컬, 오페라, 가요, 팝송 등을 한 음, 한 소절씩 찬찬히 배웠다.

한기 군은 다른 단원들보다 청각 기능이 조금 더 좋은 편이라 음을 더 들을 수 있었다. 선생님의 지휘에 맞춰 음정을 잡으면, 합창단원들은 한기 군을 따라 소리를 냈다. 그렇게 친구들과 무대를 목소리로 채웠다.

노래도 좋았지만 자신과 함께 놀고 공감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 더 신났다. 합창단에 대한 애정도 점차 커졌다. 한기 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단원이 친구가 됐고, 선생님들도 좋아서 중간에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1년에 한 번씩 정기공연을 무사히 끝내면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꼈고, 그 성취감은 다음 공연을 준비하는 발판이 됐다. 2018년 공연에서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부르며 사진 촬영하는 척 연기 했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한기 군은 "공연 리허설 때 바쁘게 움직여야 해 힘들었지만, 공연이 끝난 뒤 친구들과 서로 고생했다고 해주고 가족들 앞에서 뿌듯한 게 좋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처음에 합창단을 그만두고 싶었던 그는 단원들의 추천으로 단장까지 하고 앙상블을 졸업했다.

◇소극적이고 예민하던 아이…자신감·이해심 배워

한기 군은 과거 자신은 '자기밖에 몰랐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기억하는 한기 군도 예민한 아이였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말을 걸면 "왜 말을 거냐"며 신경질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합창단 활동 후 그는 긍정적으로 변했다. 학교의 다른 친구들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한기 군은 "합창단에서 친구들이 많이 생기면서 다른 사람들한테 말을 거는 게 쉬워졌어요. 중학교에 와서 친구들에게 먼저 말을 걸기도 했고, 마음이 맞는 친구와는 친해졌다"라고 했다. 그와 항상 붙어 다닌 형 진기 군도 "한기가 친화력이 정말 좋아졌다"고 말했다.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표정도 달라졌다. 큰 변화가 없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노래 연습을 하면서 입을 크게 벌리고 연기 연습을 하면서 다양한 표정도 짓게 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이해심'이다. 합창단에서 친구들과 부딪히고 선생님에게 상담도 받으면서 한기 군은 한 층 더 성장했다.

합창단의 친구가 발을 밟거나 때려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닐 거야"라며 마음을 먼저 헤아렸다. 학교의 발달장애인 친구가 자꾸 소리는 지르는 이유가 아이들의 괴롭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걸 알아채고, "친구들이 괴롭힐 때는 '하지 마'라고 말하면 된다"고 알려줬다.

한기 군을 오랜 기간 지켜본 파라다이스 복지재단의 관계자는 "단원들이 한기 군이 정말 좋은 단장이었다고 입을 모았다"고 전했다. 그 칭찬에 한기군은 "리더라기보다는 단원들의 입장에서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며 쑥스러운 듯 수줍게 웃었다.

"합창단 활동을 안 했으면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을 거예요. 상황이 더 악화됐을 수도 있고요. 편견을 받거나 따돌림을 당하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는 곳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어요."

◇어머니 "아이의 변화, 미래 걱정되지 않아"

현재 한기 군은 서울시가 지원하는 미술영재교육을 받고 있다. 미술을 좋아해 장학사업에 지원했고, 서류전형과 실기시험을 단번에 합격했다. 디즈니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는 날을 꿈꾼다는 한기 군. 자택 거실에는 그의 그림을 비롯해 다양한 그림들이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합창단에서 배운 성취감 덕분일까, 한기 군은 모든 일에 열심히 임한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다닌 영어학원에서도 다른 친구들보다 2배나 많은 시간을 쏟아 공부했고, 좋은 성적을 받았다.


조씨는 아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걱정을 내려놓았다. 조씨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세상의 낙인 때문에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주변에 도움을 주는 분들도 많고, 아이가 장애를 받아들이고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니 미래가 더는 걱정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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