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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국립오페라단 공동주최 그랜드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개막

박지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10.07 21:40

수정 2021.10.07 21:40

삼손과 데릴라 - 국립오페라단 (2021.10.06 사진=박범준 기자) /사진=fnDB
삼손과 데릴라 - 국립오페라단 (2021.10.06 사진=박범준 기자) /사진=fnDB
"오지 않으려 했는데, 끝내 다시 오고 말았구나/달아나고 싶지만 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구나/내 사랑이 원망스럽도다/하지만 난 여전히 사랑에 빠져있으니."
민족 구원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안고 동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으나 한 순간의 욕망에 스러져버린 영웅의 이야기가 하늘을 울렸고 관객들의 마음도 흔들었다. 카미유 생상스의 그랜드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의 관객들은 삼손이 스스로 선택한 비극적 운명에 함께 애닳아 했다.

7일 저녁 서울 남부순환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개막한 '삼손과 데릴라'는 파이낸셜뉴스가 국립오페라단과 공동 개최한 가을 대작이다. 19세기 말 프랑스 낭만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생상스는 구약성경에 나온 기원전 1500년 경 고대 가나안 땅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그대로 살려 작품을 만들었지만 이번 오페라에서 삼손과 데릴라는 3500년의 타임루프를 거쳐 20세기 초 나치주의가 가득한 독일에 도달했고, 이곳에서 유태인 레지스탕스의 리더와 독일 나치의 스파이로 다시 한번 마주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이끈 이는 연출가 아흐노 베흐나흐다. 프랑스 출신의 스타 연출가 베흐나흐는 "많은 이들이 유태인의 억압과 모욕을 떠올렸을 때 생각하는 독일 나치시대로 배경을 옮기는 것이 고대 근동을 배경으로 하는 것보다 더 극적이고 강렬하게 생상스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정신을 잘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3막 /사진=국립오페라단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3막 /사진=국립오페라단
오페라는 '수정의 밤(크리스탈 나흐트)' 사건 다음 날로부터 시작된다. '수정의 밤'은 1938년 11월 실제 독일에서 벌어진 일로 나치 돌격대와 이에 동조하는 독일인들이 유태인이 운영하던 상점과 회당을 공격한 사건이다. 밤 사이에 수많은 유리창들이 깨져 있는 상황을 보고 이같은 이름이 붙었다.

모든 것이 박살나고 깨진 회색빛의 유태인 회당의 아침, 삼손을 비롯한 수많은 유태인들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나치의 잔당들이 유태인들을 비웃으며 도발한다. 이에 분노한 삼손이 잔당의 리더를 죽이고 도시에 긴장감이 흐른다. 유태인 저항세력의 리더가 된 삼손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나치는 삼손이 이미 데릴라와 연정 관계에 있음을 알게되고 데릴라에게 삼손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 민족해방에 대한 사명감으로 불타는 삼손에 대해 질투하는 데릴라는 삼손을 나치에게 넘긴다. 고문으로 시력을 잃은 채 치욕의 시간을 보내는 삼손은 민족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나치의 유흥과 향연을 위한 공간으로 전락한 유태인 회당에서 마지막으로 혼신을 다해 기도한다.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3막 /사진=국립오페라단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3막 /사진=국립오페라단
생상스의 원작에서는 원전 성경에 쓰인대로 고대의 상황을 배경으로 삼았기에 삼손의 대적 '다곤의 제사장'이 나치의 리더로 등장하나 대본은 수정없이 그대로 가져왔다. 또 현대로 배경이 옮겨오면서 머리카락의 괴력이 나온다는 삼손의 설정 또한 생략됐다. 괴력은 잃었으나 하늘을 향해 올리는 울분과 외침은 가슴 가득하다.
테너 크리스티안 베네딕트는 이러한 삼손 역을 섬세하게 잘 소화해냈다. 데릴라 역의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의 연기 또한 우아하고 치명적이었다.
2막에서 데릴라가 삼손을 유혹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대표 아리아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는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에도 귓가를 맴돌았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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