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구원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안고 동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으나 한 순간의 욕망에 스러져버린 영웅의 이야기가 하늘을 울렸고 관객들의 마음도 흔들었다. 카미유 생상스의 그랜드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의 관객들은 삼손이 스스로 선택한 비극적 운명에 함께 애닳아 했다.
7일 저녁 서울 남부순환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개막한 '삼손과 데릴라'는 파이낸셜뉴스가 국립오페라단과 공동 개최한 가을 대작이다. 19세기 말 프랑스 낭만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생상스는 구약성경에 나온 기원전 1500년 경 고대 가나안 땅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그대로 살려 작품을 만들었지만 이번 오페라에서 삼손과 데릴라는 3500년의 타임루프를 거쳐 20세기 초 나치주의가 가득한 독일에 도달했고, 이곳에서 유태인 레지스탕스의 리더와 독일 나치의 스파이로 다시 한번 마주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이끈 이는 연출가 아흐노 베흐나흐다. 프랑스 출신의 스타 연출가 베흐나흐는 "많은 이들이 유태인의 억압과 모욕을 떠올렸을 때 생각하는 독일 나치시대로 배경을 옮기는 것이 고대 근동을 배경으로 하는 것보다 더 극적이고 강렬하게 생상스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정신을 잘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박살나고 깨진 회색빛의 유태인 회당의 아침, 삼손을 비롯한 수많은 유태인들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나치의 잔당들이 유태인들을 비웃으며 도발한다. 이에 분노한 삼손이 잔당의 리더를 죽이고 도시에 긴장감이 흐른다. 유태인 저항세력의 리더가 된 삼손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나치는 삼손이 이미 데릴라와 연정 관계에 있음을 알게되고 데릴라에게 삼손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 민족해방에 대한 사명감으로 불타는 삼손에 대해 질투하는 데릴라는 삼손을 나치에게 넘긴다. 고문으로 시력을 잃은 채 치욕의 시간을 보내는 삼손은 민족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나치의 유흥과 향연을 위한 공간으로 전락한 유태인 회당에서 마지막으로 혼신을 다해 기도한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