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글로벌 자원 '패권전쟁'의 역풍… E플레이션, 세계를 덮치다[글로벌 리포트]

강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10.17 18:14

수정 2021.10.17 18:14

정치적 무기로 떠오른 에너지자원
바이든정부와 마찰 겪는 사우디 美 요청에도 원유 증산 거부
푸틴은 천연가스 인질로 삼아 美·유럽 '러시아 옥죄기'에 반격
中, 배터리 필수소재 희토류 독점 쿼드 등 협의체 대책마련 나서
전력난까지 맞물려 에너지값 급등 북반구 국가 '혹독한 겨울' 예고
글로벌 자원 '패권전쟁'의 역풍… E플레이션, 세계를 덮치다[글로벌 리포트]

글로벌 유가 상승이 최근 위험수위에 도달하자 미국은 중동의 맹주 사우디아라비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미국은 최근 유가 상승의 여파로 시작된 물가상승인 '에너지플레이션'으로 몸살을 앓고 있어 사우디의 도움이 절실했다. 하지만 사우디가 주도하는 OPEC+는 대규모 증산을 이달 초 거부해 백악관에 충격을 줬다. OPEC+는 사우디가 포함된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OPEC에 가입되지 않은 러시아 등 기타 산유국까지 포괄하는 협의체다. 앞서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지난 9월 말 사우디를 비밀리에 방문, 증산을 촉구한 뒤 나온 결정이라 미국의 배신감은 더 컸다.

바이든 행정부 들어 미국과 미묘한 마찰을 빚고 있는 러시아, 사우디 등이 천연가스, 원유 등을 인질처럼 붙잡고 정치적 협상을 노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미국과 전면대결 중인 중국은 희토류 자원을 무기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계속되고 있다. 글로벌 에너지·자원이 정치적 무기로 부상한 것이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오른쪽)이 지난 14일(현지시간) 미 워싱턴DC 국무부에서 파이살 빈 파르한 알 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외교장관과 회담 전 취재진을 만나고 있다. 앞서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지난 9월 말 사우디를 비밀리에 먼저 방문해 원유 증산을 협의한 바 있다. 로이터 뉴시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오른쪽)이 지난 14일(현지시간) 미 워싱턴DC 국무부에서 파이살 빈 파르한 알 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외교장관과 회담 전 취재진을 만나고 있다. 앞서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지난 9월 말 사우디를 비밀리에 먼저 방문해 원유 증산을 협의한 바 있다. 로이터 뉴시스

■바이든, 인권탄합 에너지열강과 마찰

'돌아온 미국' 그리고 '전 세계 인권 보호'를 내세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후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우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등 세계 열강 지도자들의 인권말살을 문제 삼았다.

바이든은 반중국, 반러시아 정책 추진을 위해 아시아와 호주, 유럽 동맹국들까지 끌어모았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 사우디 등이 에너지와 자원을 무기 삼아 반기를 들고 있다.

중동의 맹주인 사우디는 미국과 우호관계를 기본적으로 유지해왔지만, 바이든 행정부 들어선 엇박자를 보이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의 국가정보국(DNI)이 지난 2월 기밀해제 보고서를 통해 사우디 왕실이 관여된 언론인 살해사건에 대한 책임을 추궁해온 것이 발단이 됐다. 또한 무함마드 왕세자 책임을 명시해 미국과 사우디 양국 간의 갈등이 시작됐다.

미국에 체류하며 사우디 왕실에 비판적 칼럼을 미국 언론에 기고했던 언론인 카슈끄지는 2018년 결혼서류 문제로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을 찾았다가 잔혹하게 살해됐다. 이에 대해 바이든은 대선 경선 때 '대가를 치르게 하고 이른바 왕따로 만들겠다'고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이런 와중에 유가가 고공행진하자 사태는 역전됐다. 고공행진하는 에너지 값으로 인해 물가가 치솟고 있는 미국이 사우디에 대규모 원유 증산을 요청했지만 사우디가 순순히 응하지 않는 것이다. OPEC+는 대규모 증산을 거부하고 매월 하루 40만배럴의 최소량 증산에만 머물겠다고 밝혔다.

■에너지 인질로 협상테이블 나서나

향후 사우디가 유가를 인질로 인플레이션 위기에 직면한 미국의 고자세를 누그러뜨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최소한의 증산만 유지해 고공행진하는 유가특수를 계속 누리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결국 세계 최강의 미국은 10년 만에 전략비축유(SPR)를 푸는 것을 검토해야 하는 굴욕을 당했다. 미국은 지난 2011년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향해 치닫던 오바마 행정부 당시 국제에너지기구(IEA) 회원국들과 공조해 대규모로 SPR을 방출한 이후에는 SPR에 손 댄 적이 없다.

미국의 비축유 방출 검토 소식은 사우디와 러시아 등 이른바 OPEC+가 지난 4일 각료회의에서 최근 유가 폭등세에도 불구하고 산유량을 대대적으로 늘리지 않겠다고 결정한 뒤 나왔다. 또한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2015년 오바마 행정부 당시 의회가 해제했던 원유 수출규제를 다시 도입하는 방안까지 검토 중이다.

이 같은 미국의 글로벌 정책의 역풍이 전 세계 에너지·자원 시장으로 번지면서 '에너지 인플레이션'이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러시아는 유럽에 공급되는 천연가스를 인질로 삼았다. 미국이 유럽의 나토 동맹국들과 함께 러시아 옥죄기에 나선 것에 대한 반격 무기를 에너지로 삼은 것이다. 러시아가 유럽으로 공급하는 천연가스 물량을 줄이면서 촉발된 에너지 가격 폭등 현상이 국제 원자재 시장으로 번졌다. 유럽은 상대적으로 가깝고 운송비가 저렴한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크게 의존, 전체 소비량의 43%를 러시아에서 수입한다. 2019년 기준으로 유럽연합(EU) 전력 생산 1위는 원자력(26%)이었으며 2위가 천연가스 발전(23%)이었다.

하지만 최근 유럽과 새 천연가스 수송관 건설을 마무리한 러시아는 지난 8월부터 시베리아 서부의 천연가스 시설에 불이 났다며 유럽행 가스를 크게 줄였다. 러시아는 시설 화재와 더불어 아시아 수요 증가로 유럽 물량을 줄였다고 해명했지만 시장에서는 러시아가 천연가스를 정치적 압박 수단으로 사용한다고 의심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럽은 올해 북해의 바람이 약 2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약해져 풍력발전량이 급감하는 바람에 전력수급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졌다. 유럽은 탈탄소를 위해 그 어느 지역보다 규제와 함께 신재생에너지에 집중해왔다. 유럽의 신재생에너지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풍력이다. 그러나 기상이변으로 인해 바람이 불지 않으면서 풍력발전량까지 줄었다. 탈탄소의 역습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 같은 장기적인 에너지 위험을 줄이기 위해 '탈원전 정책'까지 버리고 원전 재건설을 선언했다.

■동절기 앞두고 위기 최고조

유럽 국가들의 불만이 커지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연결하는 가스관인 '노르드 스트림 2'를 통해 러시아 국영 에너지업체 가스프롬이 더 싸게 공급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달래기를 시작했다. 러시아 정부에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자 푸틴 대통령은 해결에 나서겠다고 에너지기업들을 불러 모았다. 또한 서방의 우려처럼 '정치적 무기화'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의 발언 전까지만 해도 영국과 유럽에서 천연가스 가격은 올해 초 대비 10배 상승한 상태에서 거래됐으나 이후 10% 급락했다. 그렇지만 푸틴 대통령은 "시장에 가스 공급을 늘리는 것을 검토하되 신중하게 해야 할 것"이라며 유럽 국가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가스 공급을 늘리겠지만 상황에 따라 조절하겠다는 것이다. 푸틴이 이처럼 유럽 국가들을 애태우는 것은 미국의 대러시아정책이 영향을 미쳤다. 바이든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의 정적으로 러시아에 수감 중인 야권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가 사망하면 양국 관계를 해칠 것이라고 임기 초부터 푸틴을 압박해왔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3월 ABC방송 인터뷰에서 나발니 사건과 관련, 푸틴 대통령을 살인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변하면서 미·러 간 불협화음이 일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6월 유럽을 방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해 동맹 강화에도 나섰다.

그뿐만 아니라 테러를 당한 나발디가 독일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으면서 푸틴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간의 긴장감도 조성됐다. 메르켈 독일 총리 등은 나발니의 투옥을 용납할 수 없다며 그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는 서방의 요구를 묵살했다.

러시아는 애플, 구글 등 미국 기업에 나발니가 운영해 온 반부패재단(FBK) 앱을 제거해달라고 지난 8월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애플과 구글의 모회사인 알파벳은 아직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중국 희토류 무기화 우려 지속돼

중국은 배터리와 반도체 등에 필수소재인 희토류를 쥐고서 세계경제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우려도 계속되고 있다. 이 같은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3월 미국·일본·호주·인도의 안보협의체인 쿼드는 처음으로 화상 정상회의에서 희토류 정제기술 협력방안 등을 집중 논의했다. 현재 전 세계 희토류 생산의 약 60%를 차지하는 중국이 언제든지 희토류를 무기화할 수 있다고 보고 대응책 논의를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석탄 부족으로 심각한 전력난에 휩싸인 중국은 자국 내 외국계 기업에 대한 전기공급을 인질로 삼고 있다. 세계의 공장인 중국에는 전 세계 기업들의 제조시설이 대거 밀집해 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전력난을 이유로 최소 전기만 공급하면서 주재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심지어 불과 몇 시간 전에 단전을 통보하면서 안절부절못하게 만들고 있다. 다국적기업들이 주중대사관 등을 통해 중국 정부에 애원해야 하는 상황까지 만들고 있다.

중국 내 전력난은 중국 정부가 자초했지만 책임을 다국적기업들에 돌리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국제 석탄가격은 최대 수입국인 중국이 갑자기 변덕을 부리자 13년 만에 최고치로 급등했으며 전력난에 빠진 중국 정부는 천연가스 수입에 눈독을 들이는 분위기다.
중국의 액화천연가스(LNG) 수입량은 2015년 전 세계 수입량 대비 8%에서 올해 20%로 늘었고, 올 1~8월 LNG 누적 수입량은 5180만t으로 세계 최대 규모였다. 니혼게이자이는 결국 전력이 모자란 유럽과 중국이 천연가스를 두고 쟁탈전을 벌인다고 예상했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중국의 정전사태와 유럽에서의 전기요금 급등으로 천연가스 수요가 급증하면서 가스 부족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camila@fnnews.com 강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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