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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어지간하면 용서하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11.02 18:31

수정 2021.11.02 18:31

[서초포럼] 어지간하면 용서하자
대학 시절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던 친구가 있었다. 당시 중국은 우리에게 '중공'으로, 이른바 적성국(敵性國)이었다. 중국 문화대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8억인과의 대화'는 운동권 서클에서나 읽히던 금서였다. 그런데 중국어라니. 대부분 친구들이 그를 외계인 대하듯 한 것은 당연했다. 미국 유학파 젊은 교수님 한 분만이 머잖아 중국이 열릴 것이라는, 다소 허황하게 들리던 말씀을 하신 기억이 난다. 교수님의 격려에 힘입어 중국어 공부에 매진한 친구는 1993년 공기업 중국 베이징 주재원으로 입성하는 데 성공한다.
1992년 한중 수교 1년 만에 베이징이 완전히 열린 것이다. 남들보다 한발 앞서 준비한 그 친구는 지금도 활발하게 중국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 소식을 전하는 모든 언론이 거론하는 게 '북방외교'다. 1989년 헝가리, 1990년 구 소련, 1992년 중국 등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를 통해 대한민국의 지평을 넓힌 것이다. 일찌감치 눈을 뜬 친구나 교수님과 달리 반공교육 속에 살아온 대다수 국민에게는 충격이었다. 우리 의식 속에 존재하지 않던 세계의 어두운 반쪽이 밝아지는 경험이었다. 외교·경제영토뿐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의 정신과 인식의 영토를 무한대로 확장한 북방외교는 높이 평가해 마땅하다. YS의 세계화 정책이 호응을 얻고,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인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바탕에 북방정책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의 활동과 의식의 장애물을 일거에 걷어낸 쾌거이기 때문이다.

한중 교역 규모가 한미, 한일 교역량을 합친 금액보다 크다는 사실은 구문이다. 대중국 무역흑자도 한 해 많게는 600억달러, 적게는 300억달러 수준이다. 1992년 수교 이래 한국의 대중 무역흑자는 520조원이 넘는다. 한중 수교 후 대중국 교역으로 먹고살았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남북기본합의서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노 전 대통령 외교 업적이다.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후 12월에 채택한 기본합의서의 주요 내용은 남북한 상호 체제인정과 상호불가침, 남북한 교류 및 협력 확대안 등이다. 남북 간 문제가 있을 때마다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그 가치를 잘 알 수 있다.

대통령 직선제 수용과 직선제 개헌, 의료보험 전 국민 확대, 개발이익환수제 등 토지공개념 도입, 분당·일산 등 주택 200만호 건설, KTX와 인천국제공항 건설 추진. 외교뿐 아니라 내치의 업적을 보면 노 전 대통령은 '물태우'라는 말로 폄하할 인물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정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모든 것을 참자. 어지간 하면 용서하자. 기다리자'는 신념으로 일관해왔다." "부족한 점과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유언도 남겼다.

노 전 대통령은 찬사만 받기 어려운 인물임을 잘 안다.
12·12 군사반란, 광주 민주화운동 진압 관여, 2000억원대 뇌물 등 공과를 함께 보아야 공정한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파적 차원이라 해도 '노태우씨'라 부르며 고인의 영전에 허물만을 들춰내는 것은 마뜩잖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노 전 대통령의 허물도, 이 글의 허물도 "어지간하면 용서하시라."

노동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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