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치일반

[시선의 확장] 역사의 실타래를 푸는 사람들…'동아시아 공동워크숍'

뉴스1

입력 2021.11.06 09:00

수정 2021.11.06 09:00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감독.© 뉴스1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감독.© 뉴스1


제주도 성산일출봉 아래 해변에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말기에 만든 해군기지. 사진을 찍고 있는 뒷모습은 일본인 사진작가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돌보며 생활했다. 그 또한 ‘동아시아 워크숍’ 맴버다. (김명준 감독 제공)© 뉴스1
제주도 성산일출봉 아래 해변에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말기에 만든 해군기지. 사진을 찍고 있는 뒷모습은 일본인 사진작가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돌보며 생활했다. 그 또한 ‘동아시아 워크숍’ 맴버다. (김명준 감독 제공)© 뉴스1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이 만든 제주 알뜨르 비행장을 워크숍 맴버들이 둘러 보고 있다. 일본군의 탄약창고가 나중에 미군정에 의해 폭파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4.3 때 제주 민중이 학살당했다.(김명준 감독 제공) © 뉴스1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이 만든 제주 알뜨르 비행장을 워크숍 맴버들이 둘러 보고 있다. 일본군의 탄약창고가 나중에 미군정에 의해 폭파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4.3 때 제주 민중이 학살당했다.(김명준 감독 제공) © 뉴스1


'70년만의 귀향' 추모식에서 도노히라 스님과 정병호 교수. 두 사람의 인연이 한일 양 정부가 못한 일을 시민의 힘으로 해내는 계기가 되었다. (김명준 감독 제공) © 뉴스1
'70년만의 귀향' 추모식에서 도노히라 스님과 정병호 교수. 두 사람의 인연이 한일 양 정부가 못한 일을 시민의 힘으로 해내는 계기가 되었다. (김명준 감독 제공) © 뉴스1


광현사에서 발견된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의 위패. '소화21년 조선인남성무연3인의 영', '살해당한 조선인남성의 영'이라 쓰여있다. (도노히라 요시히코 제공) © 뉴스1
광현사에서 발견된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의 위패. '소화21년 조선인남성무연3인의 영', '살해당한 조선인남성의 영'이라 쓰여있다. (도노히라 요시히코 제공) © 뉴스1


1997년 정병호 교수는 약속을 실현했다. '동아시아 공동워크숍'의 첫 삽을 뜰 때의 맴버들. 이들은 현재 한국과 일본, 해외에서 인권, 평화, 과거사 관련 수많은 활동을 펼치고 있다. (도노히라 요시히코 제공) © 뉴스1
1997년 정병호 교수는 약속을 실현했다. '동아시아 공동워크숍'의 첫 삽을 뜰 때의 맴버들. 이들은 현재 한국과 일본, 해외에서 인권, 평화, 과거사 관련 수많은 활동을 펼치고 있다. (도노히라 요시히코 제공) © 뉴스1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의 생전 모습(도노히라 요시히코 제공)과 아들 채홍철이 보낸 '망자에게 보낸 편지'(사진출처 '70년만의 귀향'-도노히라 요시히코 지음) © 뉴스1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의 생전 모습(도노히라 요시히코 제공)과 아들 채홍철이 보낸 '망자에게 보낸 편지'(사진출처 '70년만의 귀향'-도노히라 요시히코 지음) © 뉴스1


구 광현사. 사사노보효 전시관.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전시관이며 3000명의 한·일·재일 청년들이 해마다 워크숍을 하던 곳이다. 평화디딤돌에서는 무너진 전시관을 다시 세우기 위해 모금운동을 하고 있다. (도노히라 요시히코 제공) © 뉴스1
구 광현사. 사사노보효 전시관.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전시관이며 3000명의 한·일·재일 청년들이 해마다 워크숍을 하던 곳이다. 평화디딤돌에서는 무너진 전시관을 다시 세우기 위해 모금운동을 하고 있다. (도노히라 요시히코 제공) © 뉴스1


[편집자주][시선의 확장]은 흔히 '북한 업계'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북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그간 주목 받지 못한 북한의 과학, 건축, 산업 디자인 관련 흥미로운 관점을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서울=뉴스1)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우리학교> 감독 = 지난 10월 말에 제주도에 다녀왔다. '동아시아 공동워크숍'이라는 행사다. 올해가 스물 세번째라고 한다.

주관은 사단법인 평화디딤돌 사무국이 맡고 내가 속한 시민단체도 젊은 친구들을 모아 함께 했다. 총 38명이 3박4일 동안 제주도의 구석구석을 돌며 4.3항쟁과 일제강점기가 남긴 슬픈 유산을 공부했다.

4.3평화기념관, 일제 하 주정공장 터, 사라봉, 별도봉 일본군 지하호, 성산 일출봉 일본군 해안특공 기지와 위안소 자리, 알뜨르 비행장 활주로, 지하벙커 등등. 껍데기를 벗은 탐라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죽음과 비명과 공포로 온 몸이 상처투성이었다.

현무암 언덕을 오르고 풀숲을 걸으며 온종일 이 피 맺힌 기억과 자기의 삶 어느 부분이 이어져 있는지 탐색하던 우리 중에는 재일조선인 친구들이 소수나마 있었다. 마지막 날 모든 일정을 마치고 뒤풀이가 이어지던 중에 재일조선인 친구가 감상을 이야기했다.

"저는 일본학교만 다녀서 우리말은 어른이 되어 처음 한국에 유학왔을 때부터 배웠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너무 미웠습니다. 때로는 입에 담기 힘든 욕설도 했습니다. 왜 나를 조선사람으로 태어나게 했냐고요.

요며칠 마음이 참 복잡했습니다. 주정공장 옆 제주항에 들렀을 때는 여기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본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탄 곳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제 치하 그분들의 삶과 해방 후에 제주도 사람들이 겪은 학살을 공부하고 나니 그분들이 일본행을 택한 이유를 선명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때 왜 그렇게 미워했을까, 지금 너무나 후회되고 미안합니다. 이제 겨우 우리말로 '당신들을 이해했습니다', '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분들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젖은 목소리로 말을 잊지 못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생각해 본다. 스물 세번째의 '동아시아 공동워크숍'이라고 하니 이런 순간이 적어도 스물 세 번, 아니 그 몇 십배나 있었겠지. 그 자리에서 함께 눈물 흘렸을 재일, 한국, 일본의 청년들이 만들어 내는 뜨거운 공기가 아주 조금 느껴졌다.

내가 '동아시아 공동워크숍'(이하 워크숍)을 인지하게 된 것은 2003년 즈음이었다. 교토에서 유학 중이던 송모 학생이 '동아시아 공동워크숍'에서 만난 사이라며 일본 학교에 다니는 동포 고등학생을 소개해 준 적이 있었다. 그 고등학생이 몇 년이 훌쩍 지나 홋카이도에서 영화를 찍고 있는 내 눈 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삿포로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일꾼의 아내가 되어서. 그들도 역시 '워크숍'에서 만나 사랑을 꽃 피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의 놀라움은 영화 촬영에 바쁜 나에게 별 흥미를 끌지 못했다. 홋카이도의 '슈마리나이'라는 산속 골짜기에서 매년 열린다는 것 말고는 말이다.

그로부터 또 몇 년이 흘러 영화가 개봉했고 수많은 시민 활동가를 만났으며 나도 이제 어느덧 시민단체를 이끄는 위치에 있다. 단체의 특성상 '일본'을 다루지 않을 수 없고 '과거사'와 만나지 않을 수 없다.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일제 하 강제연행, 강제노동, 성노예,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국과 일본의 활동가들이다. 그들에게서 다시 '워크숍'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1997년부터 시작된 이 활동을 통해 삶을 바꾼 사람들이 24년이 지난 지금, 한국과 일본에서 평화와 인권을 외치는 사람들의 중심에서 활동하고 있다. 학계, 시민활동가, 기관 등등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첫 발자국은 '도노히라 요시히코' 殿平善彦 라는 일본 승려에게서 시작되었다. 선대에게 절을 물려 받을 운명이었던 도노히라는 60년대 중반 교토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다. 안보투쟁, 전공투로 상징되는 일본 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홋카이도 후카가와의 절로 돌아와서는 야스쿠니 신사 국영화 반대 운동을 벌였다. 이후 동료 승려들과 함께 '소라치 민중사를 이야기하는 모임'(이후 소라치 민중사강좌로 개칭)을 만들어 근대 일본이 홋카이도 아이누 선주민과 조선인에게 드러나지 않은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홋카이도 슈마리나이 우류댐 공사에 수많은 일본인,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되었고 고된 노동의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매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소라치 민중사강좌'는 유골발굴에 힘쓰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야기다.

1989년 정병호(현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 교수)라는 한국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다른 주제의 연구차 미국에서 잠시 홋카이도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도노히라와 친구가 되어 술자리를 자주 가졌다. 어느 날 도노히라는 정병호를 조선인 희생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광현사(光顕寺)에 데려갔다. 슈마리나이 댐 근처 산속에 주지 스님도 없는 작은 절에서 만난 위패를 보고 정병호는 충격을 받았다. 약 80개의 위패 중 드문드문 조선식 이름이 보였다. 그 뒤편에 '쇼와 21년 조선인 남성 무연고 3인의 영', '살해 당한 조선인 남성의 영'라고 쓰여 있었다. 무덤도 비석도 없이 오직 나무에 이름(일본식 이름)과 사망 날짜만 덩그러니 적힌 위패 뿐이었다. 어찌어찌 유족은 찾았지만 유골 발굴은 쉽지 않았다. 매장된 곳은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뒤편 조릿대 풀숲 어딘가라고 주민들에게 들었다.

정병호는 그때 도노히라 스님에게 한가지 약속을 했다. 미국에서의 공부가 끝나 한국으로 돌아가 교수가 되면 학생들을 데리고 유골 발굴을 위해 오겠다고.

1997년 7월 30일, 슈마리나이 광현사 마당에 한국 대학생 30명, 재일조선인 김광민(현 코리아NGO센터 사무국장)이 데리고 온 오사카 민족교육추진협의회 회원 등 13명의 재일조선인 청년들, 한국의 연구자 15명, 일본의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40여명, 서승, 강만길 등 한국과 일본대학 연구자 20명, 그리고 매스컴 관계자, 스텝을 포함해 대략 200명이 모였다. 며칠전 내가 참가한 '동아시아 공동워크숍'의 전신인 '강제 노동 희생자 유골 발굴 한일 공동 워크숍'이 시작이었다. 도노히라와 정병호의 첫 만남 후 8년만에 약속이 실현된 것이다.

열흘 간 진행된 작업으로 4구의 유골이 발굴된 이래 '워크숍'은 24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무명의 유골을 발굴했고 유족의 품으로 돌려주는 작업을 해 왔다. 해마다 여름과 겨울에 열린 워크숍은 한국과 일본으로 장소를 넓혀 갔다. 유골 발굴은 어두운 과거를 마주해야 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한·일·재일의 청년 간 교류는 그만큼 진실했으며 고통스럽기도 했다. 만남은 치열한 논쟁이 되기도 했고 가해와 피해의 벽을 타고 넘어 어우러지기도 했다. 워크숍은 그렇게 한·일·재일 청년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이렇게 3000명의 참가자가 워크숍을 다녀갔다.

2015년 '70년만의 귀향'이라는 제목으로 행해진 115구의 조선인 유골이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해방 후 7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유골은 홋카이도를 출발해 일본 열도를 종단하여 부산을 통해 서울로 들어와 서울시청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루고 파주시 서울 시립묘지에 편안히 모셔졌다. 한일 양 정부가 정치 외교적인 이유로 하기를 미뤄온 일을 오로지 양쪽 시민들의 힘만으로 이루어 낸 것이다. 공동워크숍이 만들어낸 일이기도 하다.

질문이 생긴다. 도노히라는 광현사에서 찾은 위패만으로 어떻게 유족을 찾을 수 있었을까? 이 일에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 씨다. 1915년 경상북도 문경의 가난한 소작농가에서 태어난 채만진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1940년 탄광 광부로 일본에 건너왔다. 홋카이도 탄광까지 오게 된 그는 배고픔과 매질, 가혹한 노동환경을 견디다 못해 탈출을 감행했으나 다시 잡히는 일을 반복하며 해방을 맞았다. 발족식에서 도노히라가 이끄는 '소라치 민중사강좌'는 발족식에서 그의 체험담을 통해 힘을 얻고 단단해져 갔다. 그는 체험담을 전하는 자로 만족하지 않았고 소라치 민중사강좌를 도노히라와 함께 이끌었다.

그 즈음에 슈마리나이 댐을 관광삼아 찾았던 도노히라는 우연히 만난 주민의 제보로 광현사 위패를 발견한 것이다. 이름 밖에 없는 위패의 주인을 찾기 위해 그들은 슈마리나이 관청에서 오래된 매장 인허가증을 발견했고 거기에 희생자 본인의 이름과 본적이 있었다. 위패의 이름과 일치하는 조선인의 이름이 15개였다. 그렇게 15명의 조선인 희생자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유족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때 채만진 씨가 말도 안되는 아이디어를 냈다.

"죽은 본인에게 편지를 보내자. 본적지의 주소로 보내면 어떤가?"

도노히라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살아있는 사람도 아니고 죽은 자에게 편지를 보낸다니…. 그러나 채만진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에게는 홋카이도 조선학교를 막 졸업한 둘째 아들이 있었다. 아들 홍철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학교에서 조선어를 배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77년 2월 18일에 14명의 '망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신기하게도 3월에 답장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7통의 답장이 왔다. 물론 죽은 자의 유족에게서 온 것이다. 도노히라의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었다.

당시 고교를 막 졸업했던 아들 채홍철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홋카이도의 총련에서 일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강제연행, 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 포럼'의 공동대표를 도노히라와 함께 역임하며 오랫동안 일했다.

'70년만의 귀향'으로 희생자들의 유골 봉환이 대대적으로 진행될 때, 일본열도를 횡단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발상은 강제노동 희생자들이 고향에서 일본의 노동현장으로 올 때까지의 길을 역으로 밟는 여정이었다. 홋카이도에서 오사카, 도쿄, 히로시마, 큐슈를 거쳐 배로 부산, 서울로 가는 고달픈 귀향이었다. 머무는 지역마다 조선학교 학생들이 유골을 운구했다. 채만진과 채홍철 부자의 마음을 기리는 도노히라의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평생을 친구들의 유해를 찾아 헤맨 채만진이 죽어 넋이 되어 정병호를 홋카이도의 그 깊은 산속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하는 건 지나친 생각일까? 역사의 실타래에 갖힌 자가 재일조선인이라면 그 실타래를 푸는 자도 재일조선인임을 나는 여기서 또 배운다.

이 이야기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광현사'는 나중에 '사사노보효 전시관'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홋카이도 강제노동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버티다 이 낡은 전시관은 2020년 1월에 폭설로 무너졌다. 도노히라 스님과 일본 시민단체, 한국의 평화디딤돌이 재건축을 위한 모금운동을 하고 있다. 강제노동의 실제 역사를 검증하는 유일한 건물이 훌륭히 보존될 수 있도록 많은 시민의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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