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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석 칼럼] 세운상가의 눈물

노주석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01.19 18:00

수정 2022.01.19 18:44

[노주석 칼럼] 세운상가의 눈물
서울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세운상가의 '세운'은 '세계의 기운이 모인다'는 뜻이다. 1966년 기공식 때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이 호기롭게 작명한 뒤 휘호를 남겼다. 1970~80년대 세운상가는 한국의 실리콘밸리였다. 연예인이 선호하는 최고급 주상복합이기도 했다.

김 시장은 "종묘에서 대한극장 사이의 무허가 건물 일체를 철거, 정리하고 도로용지 일부에 민간자본을 유치해서 산뜻한 건물을 짓겠다"고 보고해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얻었다. 종로~청계천로~을지로~퇴계로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공터에 8개동의 상가를 세우는 엄청난 사업이었다.
무려 2200채의 건물을 허물었고, 거주자들은 보상 없이 쫓겨났다.

태생의 비화를 품은 땅이다. 일제강점기 공습 화재를 막으려고 만든 공터에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실향민과 상경민의 판잣집과 '종삼'으로 불린 집창촌이 깃들었다. 청계천 물길을 따라 동서로 흐르는 서울의 도시구조를 남북방향으로 튼 역린의 건물이기도 하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 김수근은 설계작 목록에서 세운상가를 뺐다. 설계 의도가 어그러졌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1층으로 다니고, 보행자는 보행데크로 다니는 '공중보행 도시'를 의도했지만 시공사와 지주조합의 반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결국 미완의 도심 재개발사업이 됐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세운상가를 민간주도로 재개발하겠다고 예고했다. 오 시장은 "10년 전 퇴임할 때의 계획대로 실행했다면 서울 도심은 상전벽해의 모습으로 바뀌었을 것"이라며 "세운상가 위에 올라가 종로2가부터 동대문까지 내려다보면서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박원순 전 시장이 추진한 도시재생사업이 지나치게 보전과 관리 위주로 이뤄졌다는 오 시장의 발언은 논쟁적이다. 재개발=개발, 재생=보존이라고 단정짓는 도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상인과 소유주 처지에서는 서울시장이 바뀔 때마다 불안하다.

세운상가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거나, 철거해야 마땅하다고 몰아치는 것은 당치 않다. '건축의 탄생'(김홍철, 루비박스, 2019)에서 지은이는 "건축은 그냥 땅 위에 서 있는 게 아니다. 건축의 존재이유는 마치 사람의 삶과 같다"고 비유했다. 그렇다. 당대사의 희로애락을 오롯이 담고 있는 세운상가의 존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촛불로 남았다.

세운상가와 을지로 일대를 요즘 '힙지로'라고 부른다. 구불구불한 골목 속 노포와 카페 그리고 기계·공구·인쇄상가가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 때문이다. 강북 도심이 강남 같은 빌딩숲이 될 필요는 없다. 10년 만에 복귀한 오 시장의 눈물을 이해 못할 바 아니나 개발연대의 '불도저' 김현옥 시장의 길을 따라가지 말았으면 한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두 마리의 개를 키운다고 한다.
한 마리는 '선입견'이고 또 한 마리는 '편견'이다. 옛것을 헐고 새것을 지어야 시민이 행복하고, 치적으로 남을 것이라는 정치적 선입견과 편견의 감옥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오히려 세운상가가 지난 50여년간 흘린 눈물을 닦아줘야 할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joo@fnnews.com 노주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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