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의 특급논설] 택소노미가 뭐길래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02.04 17:44

수정 2022.02.04 18:02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공개홀에서 열린 2022 대선후보 토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기념촬영을 마친 뒤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오른쪽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사진=뉴스1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공개홀에서 열린 2022 대선후보 토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기념촬영을 마친 뒤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오른쪽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사진=뉴스1

요약
·대선후보 TV토론 덕에 인기 검색어로 뜬 택소노미
·탄소중립 주도하는 EU는 원전을 그린에너지로 인정
·윤석열 후보는 자신의 원전 정책 옹호할 기회 놓쳐

[파이낸셜뉴스] 택소노미가 인기 검색어로 떴다. 3일 대선후보 TV토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공방을 벌인 덕이다. 이 후보가 "EU 택소노미라는 새로운 제도가 논의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원전 문제를 어떻게 대응할 거냐"고 묻자 윤 후보는 "EU 뭔지는 들어본 적이 없다. 가르쳐 달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민주당 조승래 선대위 수석대변인은 4일 "최소한의 기본지식도 갖추지 못한 채 허둥대는 윤 후보의 모습에 많은 국민이 실망했다"며 "윤 후보가 '가르쳐 달라'는 택소노미나 RE100은 보통의 사람에게 낯선 주제일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의 경우는 다르다"고 비판했다.

고백하자면 RE100은 신문사 밥을 먹는 나도 몰랐다. 윤호중 민주당 원내대표는 4일 "대선 후보가 RE100 자체를 모른다는 것은 충격"이라고 비꼬았다. 휴, 내가 대선 후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궁금해서 박학다식한 젊은 후배에게 RE100을 아느냐고 물었다. "처음 들었다"는 답이 왔다. 나만 무식한 게 아니라서 진짜 다행이다.

◇택소노미는 우리말로 녹색분류체계

RE100은 그렇다치고, 윤 후보가 택소노미가 뭔지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 건 누구 말처럼 충격은 아니지만 아쉬운 대목이다. 세계 기후 대응을 주도하는 유럽연합(EU)에선 꽤 오래된 이슈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4월 환경기술산업법을 개정한 데 이어 연말에 한국형 택소노미를 발표했다. 이때 원전 포함 여부가 논란이 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환경부는 한국형 택소노미에서 원전을 뺐다. 당연하다. 현 정부는 탈원전 정부니까.

택소노미는 영어로 Taxonomy다. 세금 관련 단어가 아니다. 그리스어로 분류라는 뜻을 가진 'tassein'과 법·규범의 뜻을 가진 'nomos'의 합성어라고 한다. 환경부는 이를 녹색분류체계라고 풀어쓴다. 환경부는 작년 연말에 한국형 녹색분류체계(K-Taxonomy) 지침서(가이드라인)를 내놓았다.

가이드라인은 환경기술산업법에 근거를 둔다. 개정안은 제10조의4 ②항에서 "환경부 장관은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활동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녹색분류체계를 수립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에 따라 정부는 녹색부문 64개, 전환부문 5개 경제활동을 녹색분류체계에 포함시켰다. 녹색부문은 재생에너지, 무공해 차량 등 진짜 녹색이다. 전환부문은 살짝 미심쩍은 구석은 있지만 시한부로 녹색이라고 인정한 분야다.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 또는 블루수소가 대표적이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2일(현지시간) 원전을 녹색분류체계에 포함하는 결정을 내렸다. 사진=EU 집행위 웹사이트 캡처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2일(현지시간) 원전을 녹색분류체계에 포함하는 결정을 내렸다. 사진=EU 집행위 웹사이트 캡처


◇EU는 왜 원전을 택소노미에 넣었을까

녹색분류체계에 들어가면 뭐가 좋은가. EU 집행위원회는 "2050 탄소중립을 달성하려면 막대한 민간투자가 필요하다"면서 "EU 택소노미는 민간투자를 탄소중립 달성에 필요한 활동으로 유도하는 게 목표"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어떤 산업이 녹색분류체계에 포함되면 금융 지원을 받기가 수월해진다. 글로벌 금융사들은 ESG, 곧 환경·사회·지배구조 평가에 민감하다. 이때 녹색 프로젝트를 지원하면 ESG 평가가 높아진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금융사들로선 자연 녹색 금융을 선호하게 된다.

이때문에 국내 친원전파는 녹색분류체계 안에 원전을 포함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탄소중립 시대에 원전은 탄소제로 에너지원으로 새삼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산업계의 요구는 환경부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멀리 유럽에서 녹색분류체계 안에 원전을 포함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EU는 원전을 조건부 그린 에너지로 인정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4일 "미국, 중국에 이어 EU도 원전을 탄소중립의 핵심 수단으로 삼는데 반해 우리만 거꾸로 가고 있는 셈"이라며 "향후 정부는 녹색분류체계 가이드라인을 재검토해 원전을 녹색기술에 포함시킬 것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석 달 남은 문재인정부 임기 안에 이 요청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제로다. 다만 길게 봐서 가능성은 열려 있다. 환경부는 작년말 K-녹색분류체계를 발표하면서 "(원전을 포함할지 여부는) EU 등 국제 동향을 지속적으로 파악, 국내 상황도 감안하여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빗장을 아예 잠근 건 아니라는 얘기다. EU의 결정은 환경부도 무시할 수 없는 변수다. 윤 후보는 "EU를 보라"며 라이벌 이 후보의 질문을 맞받아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경주 방폐장에 보관돼 있는 중저준위방폐물. 사용후 핵연료 등을 영구 저장하는 고준위 방폐장은 아직 국내에 없다. 사진=뉴시스
경주 방폐장에 보관돼 있는 중저준위방폐물. 사용후 핵연료 등을 영구 저장하는 고준위 방폐장은 아직 국내에 없다. 사진=뉴시스


◇ 방폐장 건설은 꼭 포함하길

이재명 후보는 토론회에서 중요한 점을 짚었다. 그는 "우리나라는 (원전을) 어디에 지을 것이냐, 핵폐기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게 의제라서 이 두 가지를 해결하지 않으면 녹색에너지로 분류가 안 된다는 거다"라며 "우리나라 원전을 어디에 지을 것인가?"라고 윤 후보에게 물었다. 핵폐기는 사용후 핵연료를 말한다. 윤 후보는 똑 부러진 답을 못했다.

먼저 원전을 어디에 지을 것이냐는 질문부터 살펴보자. 정부가 의지만 있다면 새로 지을 곳은 있다. 문 정부는 경북 울진에 지으려던 신한울 3·4호기 건설을 보류했다. 다만 산업통상자원부는 사업 허가 기간을 2023년말까지 연장했다. 공사 재개 여부는 차기 정부의 결정에 달린 셈이다.

최근 세계 원전시장은 차세대 소형모듈원자로(SMR·Small Modular Reactor)에 주목한다. SMR는 건설 기간이 짧아 비용을 줄일 수 있고, 모든 장비가 원자로 안에 들어가 있어 상대적으로 안전한 것이 특징이다. 주민과 충분한 사전 소통을 거친다는 조건 아래 SMR 입지를 찾는 게 불가능해 보이진 않는다. 한정애 환경부 장관도 연초 기자간담회에서 "SMR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발생이 상대적으로 적다"며 “SMR 개발을 위한 국고 투입과 별도로 민간에서 저리로 투자할 수 있는 방법 등을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용후 핵연료 처리는 역대 정부마다 손사래를 친 껄끄러운 사안이다. 박근혜정부는 사용후 핵연료 공론화위원회를 가동한 끝에 2016년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계획만 세웠을 뿐 방폐장 건립은 한발도 나아가지 못했다. 문 정부는 '사용후 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를 두고 전임 정부의 방폐장 정책을 다시 들여다봤다. 위원회는 작년 3월 '사용후핵연료 관리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권고안을 정부에 제출한 뒤 해산했다. 또 허송세월이다.

고준위 방폐장 건설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다. 지금 있는 24개 원전에서 나오는 사용후 핵연료를 영구 저장하기 위해서도 방폐장이 시급하다. "핵폐기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이 후보의 문제의식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급한 건 신규 원전에서 나올 폐기물이 아니라 기존 원전에서 이미 나오고 있는 폐기물이다.
임시 저장시설 보관도 한계가 있다. 백번 양보해서 새로 짓는 원전은 녹색으로 분류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방폐장 건설만은 녹색분류체계에 포함시켜 금융을 넉넉히 지원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곽인찬의 특급논설] 택소노미가 뭐길래

paulk@fnnews.com 곽인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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