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최진숙 칼럼] 선한 화가 박수근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02.09 18:07

수정 2022.02.09 18:07

[최진숙 칼럼] 선한 화가 박수근
1965년 5월 6일 새벽 1시. 서울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퇴원해 집으로 온 화가는 결국 숨을 거뒀다. 나이 쉰하나. 요절도 장수도 아니었다. '어느 예술가의 죽음/이젤조차 없이/가난으로 보낸 나날'. 신문은 그의 부고 기사에 이런 제목을 달았다. 이름 석자를 각인시키는 데 실패했던 무명의 화가. 하지만 모두가 사랑하는 국민화가에 이르기까지 오래 걸리진 않았다. 그가 박수근(1914~1965)이다.

강원 양구의 열두살 수근은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노을 지는 프랑스 바르비종 들판에서 기도하는 농부 부부를 그린, 바로 그 그림이다. 줄곧 가난을 면치 못했던 그에게 밀레 그림은 생의 목적 같은 것이었다.

동시대 유명화가 중 그만큼 전람회 출품에 애쓴 이도 없다. 초등학력이 전부였던 탓에 자신을 알릴 기회가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평론가 최열은 '박수근 평전 시대공감(2011년)'에서 그의 진가를 알아봤던 이로 김환기를 꼽는다. 그렇지만 계파갈등이 만연했던 당시 화단에서 박수근이 설 자리는 비좁기 그지없었다.

서울의 외국인들이 박수근 그림에 빠졌던 것이 흥미롭다. 장녀 박인숙은 '내 아버지 박수근(2020년)'에서 '파란 눈의 손님이 오던 날'을 이렇게 회상한다. "손님들이 온다는 기별이 들리면 우리는 전부 부엌 안으로 들어가 문을 꼭 닫고 숨었다. 그들은 화가의 집 대문을 밀고 들어온 순간 작가의 삶을 관통했을 것이다. 그 그림들은 시대와 현실을 사각틀에 봉인한 작은 한국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화가의 재평가가 시작된 건 그의 쓸쓸한 죽음 이후였다. 당대 유명 평론가 이경성은 박수근이 타계한 그해 말 '격조와 고담의 미학'을 그에게 헌정했다. 강인하고 중후한 색층의 질감, 독보적 기법으로 그 시대 보통의 삶에 경의를 표하면서 박수근은 불멸성을 가졌다. 맷돌질 하는 여인, 아기 업은 소녀, 기름장수, 노변의 행상…. 그림 속 그들은 아내였고 딸이었고, 창신동 대문을 나서면 마주치는 이웃이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미국인 후원자 마가렛 밀러에게 쓴 편지에 나온다.

작가 박완서와의 인연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1951년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둘은 함께 일했다. 스무살 박완서는 정규 영업사원, 30대 후반 박수근은 비정규 그림쟁이다. 정규 직원은 은근한 갑질을 불행의 시절 위안으로 삼아보지만 결국 알바 화가의 넘볼 수 없는 의연함에 스스로 무릎을 꿇는다. 20년 후 쓴 등단작 '나목(1970년)'의 배경이다. 작가는 "미치고 환장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던 1·4후퇴 후 텅 빈 최전방 도시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은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을 증언하고 싶었다"고 후기에 썼다.

주말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박수근 회고전을 봤다. 추운 날에도 석조전까지 줄이 길게 늘어섰다. 주최 측에 따르면 하루 1500명씩 몰린다.
이 중 4회 이상 재방문율이 26%나 된다. 이경성이 평한 '시간을 넘어서는 불세출 소박한 화가'의 힘은 정직과 선함에 있을 것이다.
끝이 안 보이는 팬데믹 고난의 시대, 박수근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jins@fnnews.com 최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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