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김혜지 기자 = 정치권의 추가경정예산(추경) 증액 방침에 정부가 연일 단호하게 맞서는 양상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지난달 국회로 제출된 14조원 규모의 정부 추경안을 2~3배로 늘려야 한다는 움직임이 물살을 타고 있다. 이에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적극적인 반대 목소리를 내며 국가신용등급 하락에 대한 걱정까지 내비쳤다.
실제로 올들어 국제 신용평가사(신평사)는 재정지출을 대하는 한국의 태도가 변화하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
10일 국회 등에 따르면 홍 부총리는 지난 8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여야의 추경안 증액 요구와 관련 "(정치권에서 추경 규모로) 35조~50조원을 얘기하는데, 그런 규모는 수용하기 어렵다는 말씀을 명백히 드린다"고 못박았다.
그는 "(추경 증액이) 인플레에 미치는 영향도 매우 우려된다"며 "(정부가 추경안 규모로) 14조원을 발표했을 때에도 국채금리가 30bp(0.3%) 올랐다. (그보다 추경 규모를 증액했을 때) 금리가 오른다면 국채시장이 감당할 수 있을까도 우려된다"고 밝혔다.
이어 "국가신용등급 평가도 (마찬가지다.) 곧 있으면 무디스·피치와 같은 신평사와 상반기 협의를 해야 하는데 그것 역시 우려된다"면서 "이쪽 (국채) 시장이 흔들린다거나 금리가 오른다거나 했을 때, 신용평가등급이 떨어진다 했을 때 미치는 영향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여야가 추경안 증액을 요구하는 주된 이유는 '소상공인 지원 강화'다. 한국이 코로나19 확산 초반 세계 주요국과 비교해 소상공인에 대한 지원이 훨씬 적었다는 것도 여야가 추경 증액을 강하게 주장하는 근거다.
하지만 홍 부총리는 소상공인 지원 하나만 볼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 경제 전체로 시야를 넓힌다면 추경 대폭 증액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선택지라는 뜻이다.
그는 "저한테 재정과 경제정책 전반을 운영하는 데 있어 책임이 주어져 있고, 이것은 단순히 소상공인 지원 문제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라며 "(추경 증액이) 국가에 미치는 영향, 국채시장과 국가신용등급에까지 미치는 영향, 거시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다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洪 "국가신용 우려" 딴소리만 아냐…피치, 재정적자 '내성' 언급
14조원 추경안이 국회를 통과할 경우 올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50.1%로 역대 최고에 달할 전망이다.
정치권 요구대로 추경 규모를 35조원까지 증액할 경우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2%포인트(p) 전후로 오른다고 기재부는 추산했다.
국가채무비율 50%는 이미 심리적 저항선을 훌쩍 뛰어넘은 수치다. 홍 부총리가 정치권의 추경 증액 요구에 확실한 반대 의사를 밝힌 것도 이 비율이 국제 신용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지점에 다다랐다는 판단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국제사회는 재정 지출·적자를 대하는 한국의 태도가 보다 덜 엄격해졌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국제 3대 신평사인 피치는 지난달 말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A-'로 유지하면서도 "지속적인 국가채무비율 상승 흐름이 전망되면서 중기적으로는 국가신용등급에 압박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피치의 설명에 따르면 올 연말 기준 AA등급의 국가채무비율 중앙값은 49.4%인데, 한국은 49.9%를 기록하면서 이를 살짝 넘어설 전망이다. 이는 다른 AA등급 국가와 비슷한 수준의 상승세(11.5%p)이지만, 피치가 주목한 부분은 따로 있다.
피치는 "한국이 재정지출을 보다 적극적으로 벌리고, 재정적자에 대한 내성(tolerance)도 점점 더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는 중기적으로 국가신용등급에 압박을 가할 수 있고, 특히 인구 고령화에 따른 지출 소요가 장기화할 것이라는 배경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10년, 20년 뒤…선거 앞두고 실종된 재정 '미래 담론'
현재 우리나라의 재정 여력은 여타 선진국에 비하면 탄탄한 편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문제는 피치의 분석처럼, 재정 여력이 빠르게 고갈되는 10~20년 뒤다. 우리나라는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인구 감소와 노년 부양비 증가로 인해 향후 수십년간 복지 지출이 급증하는 문제를 겪을 것으로 예측된다.
송경호 한국조세재정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지난해 정부의 2022년도 예산안과 중기 재정운용계획을 분석하면서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재정 압력 확장 문제를 지적했다.
송 부연구위원은 "복지 수요가 커지면서 의무지출 규모와 비중도 증가하고 있다"며 "단순히 고령화에 따른 증가뿐 아니라 수급 대상자 선정 기준의 지속적인 완화 조치와 지출단가 인상에 따라 의무지출은 지속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정부의 장기 재정전망에 따르면 현 50%대인 의무지출 비중은 2060년에는 75~79%까지 급증한다. 의무지출은 재량지출보다 축소하기 어려워 재정 압력을 크게 가중시킨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정부 대책은 거의 없는 상태다. 송 부연구위원은 "의무지출 관리방안에 대한 정부의 중기계획은 복지제도 개편과 지출 효율화 노력 정도의 추상적인 계획만 있을 뿐, 구체적 방안에 대한 고민은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마찬가지로 대선을 앞둔 현 정치권에는 재정과 관련한 미래 담론이 실종된 모습이다.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60%로 제한하는 내용의 '한국형 재정준칙' 도입 법안은 2020년 12월 말 국회로 제출됐으나 1년 넘게 계류 중이다. 대선을 앞두고 여야 모두 막대한 재정이 드는 공약을 내세우고 있어 재정준칙 논의 가능성은 당분간 없다고 봐야 한다.
이와 관련해 피치는 "다가오는 대선이 중기 재정 전망에 불확실성을 가져오고 있다"고 평가했다.
피치는 한국의 여야 대선후보가 모두 재정 지원 확대를 주장하고 있어, 대선 이후 재정적자가 크지 않게(modest) 줄어들 것이라고 봤다. 그러면서 "재정적자의 지속적인 증가 또는 우발채무 발생은 신용등급에 악영향을 주거나 강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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