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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사설] '적폐 청산'이야말로 청산해야 할 적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02.10 18:41

수정 2022.02.10 18:41

윤석열·문재인 충돌
김대중 용서가 모델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7월 25일 청와대 본관에서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 임명장 수여식을 마치고 환담장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7월 25일 청와대 본관에서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 임명장 수여식을 마치고 환담장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대선판에 '적폐 폭탄'이 터졌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9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전 정권 적폐 청산 수사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문재인 대통령은 즉각 "현 정부를 근거 없이 적폐 수사의 대상·불법으로 몬 것에 대해 강력한 분노를 표하며 사과를 요구한다"고 말했다고 박수현 국민소통수석이 10일 브리핑에서 밝혔다.

윤 후보의 적폐 발언은 경솔했다.
적폐라는 용어를 쓸 때는 전후좌우를 두루 살펴야 한다. 정치인이 휘두르는 적폐 청산 깃발이야말로 한국 정치가 청산해야 할 적폐다. 대통령학의 권위자인 함성득 교수(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는 '제왕적 대통령의 종언'에서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이 줄줄이 실패한 원인 중 하나로 전직 대통령 죽이기를 꼽는다. 김영삼부터 문재인까지 현직 대통령들은 대부분 전임자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데 열을 올렸다.

이명박정부가 들어선 뒤 검찰은 낙향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환조사했다. 그 결과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문재인정부 출범을 전후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됐고, 이명박 전 대통령도 감옥에 갇혔다. 박 전 대통령은 작년 말 특사로 풀려났으나 이 전 대통령은 여전히 수감 중이다.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전직 국가원수 연쇄 수난사(史)가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게 적폐 청산이라는 명분 아래 이뤄졌다.

문 대통령도 그 악습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5년 전 취임사에서 "이날은 진정한 국민통합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으나 빈말이 됐다. 적폐 청산과 국민 통합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다. 돌아보면 문 정부 5년은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이분법으로 되레 국론을 분열시켰을 뿐이다. 내로남불 정권이란 조롱도 받았다. 윤 후보가 누구인가. 바로 문 대통령이 검찰총장으로 발탁한 인물이다. 그런 이가 야당 후보가 된 뒤 적폐 청산 의지를 밝히고 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데는 통합을 게을리한 문 대통령도 책임이 있다.

국힘 이준석 대표는 10일 페이스북에서 "원칙론에 대해 (문 대통령이) 급발진하면서 야당 후보를 흠집 내려는 행위는 명백한 선거개입에 해당한다"고 비판했다. 미국 유력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8일(현지시간) 한국 대선이 "추문과 말다툼, 모욕으로 얼룩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여기에 적폐 청산이라는 핵탄두급 이슈까지 더해졌다. 이제 대선판은 후보·배우자를 둘러싼 네거티브 진흙탕을 넘어 진보·보수 대충돌로 치달을 판이다.

적폐 논쟁은 본질적으로 민생과 무관한 권력투쟁이다. 그저 대선 뒤 일부 정치인의 안위가 걸렸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미래 5년을 결정할 대선이 이런 식의 파워게임으로 진행되어선 안 된다.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명상록 '팡세'에서 "한 줄기의 강이 가로막는 가소로운 정의여! 피레네산맥 이편에서는 진리, 저편에서는 오류!"라고 말했다. 정의와 진리를 앞세워 함부로 남을 재단하지 말란 뜻이다.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적폐 논쟁은 당장 접는 게 옳다.

김대중 전 대통령(재임 1998~2003년)은 자신을 사지로 내몬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용서했다.
김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복권은 앞으로 더 이상의 정치 보복이 없어야 한다는 내 염원을 담은 상징적 조치였다"고 썼다. 김대중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
누가 되든 차기 대통령이 이 소중한 전통을 이어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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