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5회에 걸쳐 시청한 총 10시간이 아깝다
·갈등 조정은커녕 국론 분열을 더욱 조장
·격투기 같은 대선 토론회 꼭 해야 하나
[파이낸셜뉴스] 다섯번에 걸친 대선 토론회가 막을 내렸다. 종합 관전평은 이렇다. 늦은 밤, 두 시간씩 모두 10시간 투자해서 시청한 게 아깝다. 할 수만 있다면 10시간을 되돌려 받고 싶다.
처음엔 기대를 걸었다. 헛된 꿈이었다. 대통령 자질을 갖춘 후보를 찾지 못했다. 되레 단점만 도드라졌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맘에 들든 안 들든 유권자는 한 명을 골라 투표장에 가야 한다. 기권도 있지만 5년에 딱 한 번 오는 기회를 그냥 버릴 순 없는 노릇이다. 토론회 총정리를 통해 누구를 찍어야 할지 한번 더 고민해보자.
◇2월3일 1차 토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윤석열 국민의힘, 안철수 국민의당, 심상정 정의당 후보 등 4명이 고정 멤버로 출연했다. 다섯번 가운데 처음 두 번은 임의 토론회, 세 번은 중앙선관위가 주관한 법정 토론회다.
돌아보니 1차 토론은 양반이었다. 안 후보는 토론회 뒤 "처음이라 그런지 서로 자기의 제일 높은 수준의 무기들을 안 꺼내놓은 것 같다"고 평가했다. 네거티브는 거의 없었다. 상대와 얼굴을 붉히는 일도 보이지 않았다. 파이낸셜뉴스는 '네거티브 없는 TV토론, 합격점 줄 만하다'는 사설을 실었다.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먼저 안 후보가 국민연금 개혁을 제안했고, 다른 후보들이 모두 동의했다. 이번 대선 토론에서 유일하게 거둔 4자 합의가 아닌가 싶다.
RE100과 택소노미(녹색분류체계)도 갑자기 떴다. RE100(재생에너지 100%)을 아느냐는 이 후보의 질문에 윤 후보가 머뭇거렸다. 이를 두고 대선 후보가 그것도 모르느냐는 비판, 대선 후보가 그런 자잘한 것까지 알아야 하느냐는 옹호가 엇갈렸다.
◇2월11일 2차 토론
2차 토론이 끝난 뒤 나는 '대통령감 정말 없구나'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다. 탐색전을 마친 후보들, 특히 양강 이재명·윤석열 후보는 사사건건 충돌했다. 이 후보는 김건희씨, 건진법사 등 민감한 사안을 들고 나왔다. 윤 후보는 대장동에 백현동 의혹까지 더블로 얹었다. 이 후보는 "검사가 왜 그러십니까"라고 비꼬았고, 윤 후보는 "자꾸 사실이 아닌 말씀을 하시니까"이라고 맞받았다. 존중과 배려는 실종됐다.
2차 토론은 한국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듯했다. 우리나라 진보·보수는 편을 짜서 자기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는 틀렸다고 X표를 긋는다. 이·윤 후보가 바로 그렇게 싸웠다. '토론회'란 간판이 부끄럽다.
◇2월21일 3차 토론(법정1차)
최악의 토론회였다. 나는 '전파낭비가 된 대선 토론회'란 제목으로 칼럼을 썼다. 기자로서 의무감만 아니었다면 도중에 TV를 껐을 것이다. 학생들이 보고 배울까봐 겁났다. 19금 딱지를 붙이고 싶었다. 과장이 아니다. 토론장은 적개심으로 가득 찼다. 주먹질, 발길질만 없었다 뿐이지 격투기라도 보는 줄 알았다.
이 후보는 "윤석열은 영장 들어오면 죽어"라는 말이 적힌 화천대유 녹취록 패널을 들고 나왔다. 윤 후보는 "그 녹취록 끝에 '이재명 게이트'란 말을 김만배가 한다는데 그 부분까지 포함해서 말씀하시라"며 되받아쳤다. 이 후보는 "거짓말을 하느냐. 허위 사실이면 후보에서 사퇴하겠냐"며 반발했다.
이 후보는 "우리가 곧 기축통화국으로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해 논란을 불렀다. 현실을 직시하자. 기축통화는 패권국의 전리품이다. 미국의 힘은 달러에서 나온다. 중국 위안은 달러 앞에서 아직 쩔쩔 맨다. 한국은 기축화국을 말할 단계가 아니다. 장차 원화가 기축통화 가능성이 높으니 지금 국채를 더 찍어도 상관없지 않느냐는 발상은 위험천만하다.
윤 후보는 성장전략으로 디지털 데이터 경제를 강조했다. 원조 벤처세대인 안 후보는 "빅데이터 기업과 플랫폼 기업은 완전히 다르다"며 "윤 후보가 둘을 구분을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윤 후보가 경제 용어를 들고 나올 때마다 아슬아슬하다. 벼락치기 공부한 흔적이 또렷하다. 평생 검사만 했으니 당연하다. 차라리 경제는 전문가 장관에게 맡기겠다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2월25일 4차 토론(법정2차)
한국 정치 수준에 무력감을 느낀 날이다. 이·윤 두 사람은 줄기차게 붙었다. 이 후보는 "빙하 타고 온 둘리 같다"고 비꼬았고, 윤 후보는 "이완용이 안중근에게 나라 팔아먹었다고 하는 꼴"이라고 맞받았다.
우크라이나 발언도 이때 나왔다. 이 후보는 "6개월 초보 정치인이 대통령이 돼서 나토가 가입을 해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가입을 공언하고 러시아를 자극하는 바람에 결국 충돌하게 됐다"고 말했다. 윤 후보를 비판하려다 국제 영웅으로 떠오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건드렸다. 패착이 아닐 수 없다.
이재명은 이튿날 페이스북에서 "제 본의와 다르게 일부라도 우크라이나 국민 여러분께 오해를 드렸다면 제 표현력이 부족했던 것"이라고 머리를 숙였다. 2일엔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와 화상면담에서 "러시아의 공격은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강력히 규탄한다"고 말했다. 지도자는 특히 외교 사안을 언급할 때 입이 천금처럼 무거워야 한다.
참고로 '나토가 가입을 해주지 않으려고 했다'는 말은 이 후보가 잘못 이해한 것이다. 2008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정상회담에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는 우크라이나의 회원국 가입을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카드는 아직 살아 있다. 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명분이기도 하다.
윤 후보는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진입 가능성을 딱 부러지게 부인하지 않아 비판의 빌미를 줬다. 아니나 다를까, 이 후보는 26일 특별성명에서 "윤석열 후보가 어제(25일) 토론에서 유사시에는 일본 자위대가 한국에 들어올 수도 있다는 망언을 했다"고 비판했다. 윤 후보는 3·1절 특별성명에서 "역내 평화를 위해 한미동맹과 한미일 안보협력이 함께 필요하다는 취지의 발언도 진의를 왜곡하여 친일 프레임을 덧씌우고 있다"고 반박했다.
실제 발언을 보면 심상정 후보가 윤 후보에게 "유사시에 한반도에 일본이 개입하도록 허용하는 건데, 그것을 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윤 후보는 "한미일 동맹이 있다고 해서, 유사시에 들어올 수도 있는 것이지만 꼭 그걸 전제로 하는 동맹은…"이라고 얼버무린다.
문재인 정권은 일본 얘기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부터 보인다. 바로 이웃한 세계 3위 경제대국과 이렇게 척을 지는 게 과연 국익에 보탬이 될지 의문이다. 그렇지만 일본과 묵은 앙금을 풀더라도 자위대는 맨 마지막 옵션이 돼야 한다. 아직은 우리 땅, 바다, 하늘에서 욱일승천기를 용납할 수 없다.
◇3월2일 5차 토론(법정3차)
마지막 5차 토론은 중반 넘어서까지 진중하게 진행됐다. 아, 마지막이라 유종의 미를 거두려는 모양이구나 여겼다. 웬걸, 마지막 20분을 남기고 이재명·윤석열은 초절정 한판 싸움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윤 후보가 대장동을 물고 늘어지자, 이 후보는 "대선이 끝나도 특검을 하고, 거기서 문제가 드러나면 대통령에 당선돼도 책임을 지자. 동의하십니까"라고 반격했다. 윤 후보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이것 보세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후보가 재차 "동의하느냐"고 묻자 윤 후보는 다시 "이거 보세요"라며 언성을 높였다. 이 후보는 "국민 여러분 한번 보십시오. 누가 진짜 (대장동) 몸통인지"라고 했고, 윤석열은 "거짓말에 워낙 달인이다 보니 못하는 말씀이 없다"고 응수했다.
두 사람은 이재선씨(이재명 후보의 형)가 연루된 정신병원 강제입원 제도를 놓고도 앙앙불락했다.
페미니즘, 여성가족부 폐지를 둘러싼 토론 역시 후보들끼리 감정만 앞세우는 바람에 건설적인 토론이 이뤄지지 못했다. 기본소득, 공약 재원 조달, 증세 등 민생과 연관된 사안은 겉핥기에 그쳤다.
◇무용론 넘어 해악론
5차 토론회 이튿날인 3일 윤석열·안철수 후보가 단일화를 선언했다. 이제 3·9 대선은 사실상 이재명·윤석열 양자 대결로 좁혀졌다. 하지만 두 사람은 토론회에서 대통령다운 자질을 보여주지 못했다. 무엇보다 여유가 없는 게 아쉽다. 대통령이 되면 별별 사람을 다 만나야 한다. 야당 대표는 물론 일본 총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날 수도 있다. 이럴 때 상대방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능력은 지도자가 갖춰야 할 필수 덕목이다. 상대방 말 한마디에 발끈, 붉으락푸르락해서는 곤란하다.
토론회 내내 시청자를 미소짓게 하는 위트, 유머도 듣지 못했다. 기억할 만한 촌철살인 어록도 없다. 감동은 언감생심이다. 그저 찌르기, 누르기, 꺾기만 보였다.
정치는 갈등을 통합으로 이끄는 예술이라고 한다. 2022년 대선 토론회는 정확히 그 반대로 갔다. 대선 토론회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 사회는 더 갈라지고 더 찢어졌다. 겉으론 민생과 통합을 말하지만 속으론 오로지 권력을 잡으려는 생각뿐이다. 토론회 무용론을 넘어 해악론이 나올 판이다. 진지하게 묻는다. 이런 토론회, 계속 해야 하나?
paulk@fnnews.com 곽인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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