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류석우 기자 = 음식점에서 상대방과의 대화를 녹음·녹화하기 위해 식당 주인 몰래 장치를 설치·제거한 행위는 주거침입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단이 나왔다.
식당에 도청장치를 설치해 대화를 녹음해 언론에 폭로한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1997년 주거침입이라고 판결한 지 25년 만에 판례가 바뀐 셈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24일 주거침입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씨 등의 상고심에서 검찰 측 상고를 기각하고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전남 광양시에 위치한 한 업체직원 A씨와 B씨는 한 인터넷 언론사 기자가 회사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를 쓰자, 향응을 제공하고 부적절한 요구를 하는 장면을 녹음·녹화하기 위해 식당 주인 몰래 음식점에 장치를 설치·제거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 사건 쟁점은 A씨 등이 식당 영업주의 승낙을 받아 음식점에 들어갔다고 해도, 영업주가 실제 목적(녹음·녹화장치 설치 및 제거)을 알았다면 승낙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정이 인정되는 경우 주거침입죄가 성립하는지 여부였다.
1심 법원은 이들의 행위가 유죄라고 보고 각각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1심은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음식점이라도 도청용 송신기를 설치할 목적으로 음식점에 들어갔다면 영업주의 명시적 또는 추정적 의사에 반해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단기간에 반복해 범행을 저지른 점을 보면 죄질이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2심의 판단은 달랐다. 2심 재판부는 A씨 등이 식당 관리자의 명시적 또는 추정적 의사에 반해 식당에 침입했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기자와의 대화를 녹음·녹화한 행위도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해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A씨 등이 방실에서 식당 관리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기자와의 대화를 녹음·녹화했다고 하더라도 불법행위 등에 해당하지 않는 이상, 방실에 들어간 것 자체가 관리자의 의사에 반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지난 1992년 대선을 앞두고 발생한 '초원복집 사건'과 유사해 관심을 모았다.
초원복집 사건이란 김기춘 당시 법무부 장관 등 정부 측 인물들이 부산 초원복집에 모여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관권 선거와 관련된 대화를 나눈 것이 도청으로 드러난 사건이다.
당시 통일국민당 측이 도청장치를 설치해 대화 내용을 녹음한 뒤 언론에 폭로했는데, 관권선거와 관련된 대화내용보다는 도청사건이 부각돼 오히려 보수층 결집 효과를 가져왔다.
도청장치를 설치한 당 관계자들은 주거침입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대법원은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음식점이라 하더라도, 영업주의 명시적 또는 추정적 의사에 반해 들어간 것이라면 주거침입죄가 성립된다"며 유죄로 인정했다.
그러나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다른 판단을 내놨다.
대법원 재판부는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음식점에 영업주의 승낙을 받아 통상적인 출입방법으로 들어간 경우에는 설령 영업주가 실제 출입 목적을 알았더라면 출입을 승낙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더라도 주거침입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어 "A씨 등이 이 사건 음식점의 영업주로부터 승낙을 받아 통상적인 출입방법에 따라 들어간 이상 사실상의 평온상태가 침해됐다고 볼 수 없으므로 침입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다수 의견에는 김재형·안철상 대법관을 제외한 11명이 동의했다.
김 대법관과 안 대법관은 별개의견을 냈다. 별개의견이란 다수의견과 사건에 관한 결론은 같지만, 결론에 이르게 된 근거가 다른 의견을 말한다.
이들은 별개의견에서 "'사실상의 평온상태를 해치는 모습'이라는 의미는 추상적이고 불명확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며 "사실상의 평온상태가 침해됐는지에 따라 침입 여부를 판단하더라도, 거주자의 의사에 반하는지를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로 삼아 주거침입죄의 성립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이 사건에선 A씨 등이 영업주의 현실적인 승낙을 받아 음식점에 들어갔으므로 사실상의 평온상태가 침해됐다고 볼 수 없다"며 "주거침입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대법원 관계자는 "주거침입죄의 보호법익의 관점에서 침입의 의미와 판단기준을 객관화하여 사실상의 평온상태가 침해됐는지에 따라 주거침입죄의 성립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원칙을 재확인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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