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사설

[최진숙 칼럼] 게티 컬렉션, 이건희 컬렉션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05.11 18:35

수정 2022.05.11 18:35

[최진숙 칼럼] 게티 컬렉션, 이건희 컬렉션
미국의 석유재벌 폴 게티(1892~1976)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당대 세계 최고 부자에 속했으나 그보다 구두쇠일 순 없는 사례가 숱했다. 그 유명한 손자 납치사건(1973년) 때 보여준 일화가 가장 많이 회자된다. 손자의 잘린 한쪽 귀를 소포로 받고 나서야 게티는 협상에 나섰다. 납치범이 요구한 몸값은 1700만달러. 그는 이를 깎아 300만달러에 합의를 본다. 하지만 실제 부담한 액수는 여기에 못 미쳤다.
소득공제가 가능한 200만달러만 내줬다. 개인사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다섯번의 결혼과 다섯번의 이혼, 자식들은 마약중독이거나 자살이거나. 도피처로 삼았던 것이 예술품이다.

게티 사후 로스앤젤레스 샌타모니카 언덕에 태양처럼 빛나는 하얀 성곽 '게티센터'가 세워졌다. 그가 생전 수집한 희대의 명품들은 이곳을 예술애호가들의 성지로 만들었다. 그의 막대한 기부금으로 차려진 이 미술관은 주차비를 뺀 모든 것이 무료다. 게티의 유언을 따랐다. "어떤 사람의 재산도 그 자신의 삶을 바칠 만한 목적이 될 수 없다." 인색했던 부호의 최후는 그렇게 창대했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수집은 지금의 삼성을 일군 방식과 흡사하다. 삼성가 미술품수집에 깊숙이 관여했던 미술사학자 이종선은 이 회장의 컬렉션을 명품주의로 정리한다(저서 '리 컬렉션'). 1993년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의 미술품 수집에도 일대 개혁 바람이 불었다. '다 바꿔!'를 내걸고 밀어붙인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 결과 160점 넘는 국보급 유물이 모였다. 전문가 수업, 빠른 판단, 전격 구매가 이 회장 스타일이었다. 사적 취향의 선을 지키려 했던 이병철 선대 회장과 결이 달랐다.

이종선에 따르면 이병철 선대 회장은 청자 마니아, 이건희 회장은 백자 마니아였다. 지난해 유족들이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에 달항아리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다. 이 회장은 고수들을 옆에 두고 백자 공부를 자청했다. 경영수업 중간에 남몰래 골동품 수업까지 들었다.

2만여점에 이르는 '이건희 컬렉션'은 국보, 보물에서 고전 서양 명작, 근현대 한국 작가의 그림·조각까지 방대하다. 그러면서 중심에 둔 것이 '한국적인 것'에 대한 물음이다. "현재 우리 문화의 색깔이 있느냐, 우리 나름의 문화 정체성이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이건희 에세이'). 그의 컬렉션에 대한 반응은 매번 뜨겁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이건희 컬렉션' 기증 1주년을 맞아 350여점을 전시 중인 '수집가의 초대전'도 매진 행렬이다.

제약사 영업맨 시절 월급을 쪼개 미술품을 사 모은 안병광 유니온약품 회장의 족적도 남다르다. 취미로 시작한 수집의 기준은 추억과 감흥이었다. 어머니가 떠올라 보자마자 구매한 그림이 박수근의 '젖먹이는 아내(1958년)'다.
그렇게 모은 걸작들을 자기만의 방에만 둘 수 없어 미술관을 차린 지 올해로 10년.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은 지금 10주년 특별전이 한창이다.

수집가들의 헌신이 그 나라 문화, 예술의 토양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세계로 뻗은 한류도 이들에게 빚이 있다. 기꺼이 그들의 초대를 즐겨볼 것, 그리고 헌신의 기운이 사회 구석구석으로 퍼질 수 있기를.

jins@fnnews.com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