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최진숙 칼럼] 젤렌스키의 100일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06.08 18:14

수정 2022.06.08 18:14

[최진숙 칼럼] 젤렌스키의 100일
번쩍이는 분홍빛 의상으로 치장한 청년은 단호한 스텝을 밟고 있었다. 현란한 몸짓으로 압도하는 눈빛의 청년은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의 리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다. 그는 2006년 우크라이나 춤 경연대회 우승자였다. 그의 춤 동영상 편집본은 지금도 SNS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끌고 있다. 소화가 안 되는 장르가 없다. 이토록 유쾌한 대통령의 과거라니.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 남동부 전형적인 소련풍 공업도시 크리바리흐에서 자랐다.
"칼을 휘두르는 마을 폭력배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유머감각과 대담함, 의지할 수 있는 패거리가 있어야 했다. 젤렌스키는 이 모든 것을 넘치게 가지고 있었다." 헝가리 출신 호주 언론인이 최근 펴낸 그의 첫 평전 '젤렌스키'에 나오는 대목이다.

학구파 유대인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법학을 전공했으나 대학 때 빠졌던 연극을 진로로 삼아 쇼비즈니스로 화려한 성공을 거둔 뒤 대통령으로 직행한 궤적은 언제 봐도 드라마틱하다. 정치인 뜻은 언제 품었을까. "정치시트콤 '국민의 종'을 만들면서 비로소 정치적 주제를 연구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경험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괜찮은 사람이기만 하면 된다"는 말도 했다.

이 유쾌한 초짜 정치인을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시킨 것은 정치부패에 지긋지긋했던 우크라이나 국민의 선택이었다. 서구 언론은 내내 호의적이지 않았다.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의 코미디 정치라는 조롱이 계속 나왔다. 지지부진한 부패척결에 국민들 인기도 시들해졌다.

러시아군이 국경을 넘기 전날(2월 24일), 전 세계가 패배의 시선으로 이 나라를 지켜보고 있을 때 젤렌스키의 비디오 연설이 전파를 탔다. "우리는 전쟁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를 공격한다면, 당신들은 우리의 등이 아니라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젤렌스키' 저자의 표현대로 "심상치 않은 징후"였다. 젤레스키의 반전은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제 100일을 넘어섰다. "대통령은 여기 있다"는 그 유명한 32초짜리 키이우 거리 영상이 공개된 때가 전쟁 이튿날이었다. 저항의 구심이 된 것은 전쟁터 한복판에서 날아온 젤렌스키의 언어였다. "당신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걸 증명해달라. 그러면 생명은 죽음을 이기고 빛은 어둠을 이길 것이다" "필요한 건 도망차량이 아니라 탄약이다" "처벌받지 않은 악은 날개를 달고 전능함을 느끼며 돌아온다." 그를 티셔츠 입은 처칠로 거듭나게 한 대사들이다.

지난 100일 서구를 흔들어 깨운 젤렌스키의 메시지 힘은 계속될 수 있을까. 예측불허의 전쟁이 길어지면서 서구의 누적된 피로감에 이제 젤렌스키가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러시아에 영토를 떼어주고 전쟁을 끝내라." 전직 미국 외교관 헨리 키신저의 최근 발언은 정의의 수호자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사고 있지만, 현실을 직시하라는 목소리가 이전보다 커진 것은 사실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광인전략'은 여전히 유효하다. "혐오스러운 지도자와 협상하는 것이 정치"라는 말까지 나온다.
기다렸던 서구의 분열을 등에 업고 푸틴이 결국 웃을 것인가. 반전의 주인공 젤렌스키의 어깨가 다시 무거워지고 있다.

jins@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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