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노주석 칼럼] 둔지산을 돌려다오

노주석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06.15 18:28

수정 2022.06.15 18:28

[노주석 칼럼] 둔지산을 돌려다오
우리가 알고 있는 용산은 진짜 용산이 아니다. 대통령이 집무실을 옮긴 국방부 청사가 있고, 미군기지를 돌려받은 용산공원이 있는 땅에 용산은 없다. 엄밀하게 따지면 신용산이다. 용산은 인왕산에서 안산(무악재)과 대현, 애오개를 거쳐 만리재와 용마루고개까지 길게 뻗어 한강변에 닿은 산줄기 일대를 일컬는다. 천주교 용산성당이 들어선 봉우리 이름이 바로 용산이다.

고산자 김정호가 1861년에 펴낸 대동여지도 중 서울 사대문 밖 지도인 경조오부도에 용산이라는 지명이 뚜렷하다.
조선 후기 서울의 행정구역인 용산방에는 만초천의 서쪽 청파역과 공덕리가 속했다. 요즘 각광받는 신용산은 일제강점기 일본 군사시설과 배후시설이 들어서면서 새로 개발된 지역이다.

경조오부도에 보면 지금의 신용산 지역엔 둔지산이라는 지명이 새겨져 있다. 둔지방이라는 행정구역 안에 둔지산이라는 70m 높이의 야트막한 산이 있었고, 둔지미 마을이 깃들어 있었다. 둔지미는 둔덕 혹은 '둔전(屯田·군량미 마련을 위한 토지)을 부치던 마을'에서 생성된 자연지명이다.

미군기지 안 남단 터와 둔지미 마을 터가 증언한다. 둔지방은 18세기 한양이 서남쪽으로 확대되면서 설치된 5개의 방(서강방, 용산방, 한강방, 두모방, 둔지방) 가운데 하나였다. 임오군란 때 청나라군이 주둔했고, 일본군이 신용산이라는 이름을 멋대로 붙였다. 해방 후 미군은 기지와 이름을 승계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용산공원 시범개방 첫날인 지난 10일 국민의힘 지도부와 오찬회동을 갖고 "공원 주변에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위한 작은 동상들을 세우고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라고 이름을 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영어로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라고 하면 멋있는데 국립추모공원이라고 하면 멋이 없어서 우리나라 이름으로는 무엇으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명칭에 대한 고민의 일단을 드러냈다. 대통령의 영어 사대주의, 한글 비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대통령이라고 모든 걸 다 알 수도, 잘할 수도 없다. 은연중에 취향을 나타낼 수도 있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공간의 장소성을 결정짓는 땅의 내력과 지명의 유래에 소홀하다는 점이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집무실 이전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을 유행시켰다.

정부는 올 초 미군 반환부지의 이름을 공모한 끝에 용산공원이라고 확정했다. 대통령 집무실의 명칭도 공모했다. '이태원로22' '바른누리' 등이 후보로 추려졌으나, 14일 국민적 공감대 부족을 이유로 선택되지 않았다. 다행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0년 수도 서울이 한자로 표기가 안 된다는 이유로 수도명칭 제정연구위원회를 만들어 명칭공모에 나섰다. 1등은 우남시였다. 우남(雩南)이 뭐냐고? 이승만의 호였다. 4·19혁명으로 백지화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우남특별시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다 그런 것이다. 권력에 영합하기 마련이다.


둔지미와 둔지산은 식민치하에서 강제로 이름을 잃었다. 엉뚱한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장소의 고유성마저 상실한 것은 아니다.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 대신 둔지공원이라고 하면 어떤가. 대통령 집무실의 별칭을 둔지마루로 하면 또 어떠한가. 굳이 이름을 붙이겠다면 둔지라는 정겨운 본명을 되살렸으면 좋겠다.

joo@fnnews.com 노주석 논설실장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