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23년 6개월간 정신병원 입원…제 인생이 사라졌어요"

뉴스1

입력 2022.07.02 10:35

수정 2022.07.02 10:35

1일 오후 광주 서구 쌍촌동에 있는 5·18단체 사무실에서 만난 김항호씨(64)가 80년 5월의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그는 5·18로 인한 정신적 트라우마로 20여년의 시간동안 정신병원 입원생활을 했다. 2022.7.2/뉴스1 © News1 이수민 기자
1일 오후 광주 서구 쌍촌동에 있는 5·18단체 사무실에서 만난 김항호씨(64)가 80년 5월의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그는 5·18로 인한 정신적 트라우마로 20여년의 시간동안 정신병원 입원생활을 했다. 2022.7.2/뉴스1 © News1 이수민 기자


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자료사진. 21일 광주 동구 금남로 전일빌딩 앞에 배치된 계엄군 장갑차에 12.7mm 기관총에 실탄이 장착돼 있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제공) © News1DB
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자료사진. 21일 광주 동구 금남로 전일빌딩 앞에 배치된 계엄군 장갑차에 12.7mm 기관총에 실탄이 장착돼 있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제공) © News1DB


광주시청 앞 상무대 옛터 사적지 표지석.(광주시 제공) © News1DB
광주시청 앞 상무대 옛터 사적지 표지석.(광주시 제공) © News1DB


1일 오후 광주 서구 쌍촌동에 있는 5·18단체 사무실에서 만난 김항호씨(64)가 80년 5월의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그는 5·18로 인한 정신적 트라우마로 20여년의 시간동안 정신병원 입원생활을 했다. 2022.7.2/뉴스1 © News1 이수민 기자
1일 오후 광주 서구 쌍촌동에 있는 5·18단체 사무실에서 만난 김항호씨(64)가 80년 5월의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그는 5·18로 인한 정신적 트라우마로 20여년의 시간동안 정신병원 입원생활을 했다. 2022.7.2/뉴스1 © News1 이수민 기자


[편집자주]'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이수민 기자 = '틱, 틱….'

양쪽 엄지손가락을 번갈아 가며 입으로 가져간다. 익숙하게 앞니로 손톱을 물어뜯는다. '틱, 틱' 거리는 소리가 빈 사무실을 울린다.

딱히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한 불안한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린다. 빤히 바라보는 취재진의 눈길을 애써 피하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손톱 물어뜯기를 멈추곤 어쩔 줄 몰라 한다. 자세를 여러 차례 고쳐 앉더니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퇴, 퇴원한 지 얼마 안 돼서요. 사, 사람들이 무섭고, 말하기도 어렵고…."

1일 오후 광주 서구 쌍촌동에 있는 5·18단체 사무실에서 만난 김항호씨(64). 퀭하게 풀린 눈빛엔 불안함이 가득했다.

불안과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해 이런저런 가벼운 질문들을 꺼냈다.

김씨는 20년 넘게 정신병원에서 생활한 뒤 한 달 전에 퇴원해 아직 바깥세상이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5·18단체 활동이나 행사에 참여한 적도 없다. 5·18 회원들과도 전부 초면이다. 5·18단체 사무실도 인터뷰 때문에 처음으로 찾았다고 했다.

"어색하진 않으세요? 차라리 집에서 인터뷰하는 건 어때요?

김씨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 가족들 눈치가 보여서요."

김씨는 1980년 5월의 회오리에 휘말린 후 23년 6개월간 정신병원에 있었다. 42년 중 절반 이상을 외부와 차단된 병원 신세를 졌다.

광주 북구 운암동에 있던 한빛신경정신과에 13년, 무등병원에서 8년 6개월, 나머지 2년은 이름도 가물가물한 병원 4~5곳에 입원했다.

오랜 입원 생활을 하다 보니 광주 정신과 의사 중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병명은 '불안 장애'와 '우울증'이다.

"굉, 굉장히 불, 불안했어요. 어떻게 감당을 못할 정도로요. 20여 년간 거의 단 한 순간도…. 하, 편했던 적이 없어요."

80년 5월15일, 김씨는 상무대 190공병대대 2중대에서 군 생활을 마쳤다.

당시 김씨 가족은 동구 계림동에 살았다. 아버지는 "이제 사회인이 될 테니 양복을 맞춰 입으라"며 전역 선물로 돈 100만원을 쥐어줬다.

신이 난 김씨는 18일 오후 4시쯤 시내로 향했다. 6번 버스를 타고 수기동에서 내려 충장 파출소 골목으로 들어섰다.

"도망가세요! 얼른!"

휑한 골목 끝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골목 끝 쪽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김씨 쪽으로 달려왔다.

"저, 저는요. 깜짝 놀라서 '어, 어? 어?'하다가 그 사람들과 같이 도망치게 됐어요. 이유도 모르고…. 달리다가 '다방'! 다방 간판을 보고 어떤 건물 2층으로 올라갔어요."

가쁜 숨을 내쉬며 다방 창가에 앉았다. 차를 주문하고 바깥 동태를 살폈다. 군복 차림의 남성 2명이 다방 앞을 기웃거렸다.

김씨는 왠지 모르게 그들에게 잡히면 안 될 것 같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고 했다.

군인들은 전봇대 뒤와 상가 앞 적치물 등을 샅샅이 뒤졌다. 한 청년이 옷 가게 가판 뒤에 숨어있다가 발각됐다. 군인들은 곤봉을 꺼내 그를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빠, 빠져나가야 쓰겄다, 여기 있다간 죽겄다 해서 곧장 내려가 도망쳤어요. 고것이 무, 문제였습니다."

큰 길가로 나갔다. 금남로 삼거리에는 탱크와 장갑차가 가득했다. 도청부터 금남로 한일은행 앞까지는 차려 자세를 한 군인들이 양쪽에 열 지어 있었다.

지휘관급으로 보이는 군인이 시민 한 명를 지목하면 계급이 낮은 군인들은 우르르 달려가 폭행했다.

김씨는 두려운 마음에 빨리 버스 정류장 쪽으로 가려고 달렸다. 한 여성과 부딪히며 쓰러졌다. "죄송하다"고 사과하며 일어나려는데 멀리서 자신을 가리키는 군인의 손짓이 보였다.

계엄군 6~7명이 김씨에게 달려들었다. 발길질이 이어졌다. 발로 머리를 차고, 박달나무 몽둥이로 어깨를 내리쳤다. 군홧발로 다리를 밟힌 채 개머리판으로 맞았다. 한 군인은 대검 달린 총 끝으로 김씨를 찌를 듯 겨눴다.

김씨는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왜 이러세요."
"이 X놈 새끼, 간첩 새끼, 죽어라."

군인이 대검으로 김씨를 찌르기 직전, 상관이 그를 말리며 "죽이면 안 된다. 생포하라"고 했다.

김씨는 전일빌딩 건너편에 있는 관광호텔 앞으로 끌려갔다. 그곳에는 김씨처럼 끌려 온 50~60명의 시민들이 있었다.

오후 6시쯤 되니 군인들은 이들을 버스에 태워 광주경찰서 유치장으로 데려갔다.

"모, 모두가 하도 두들겨 맞다 보니 유치장 안에는 피비린내가 났어요. 도시락을 받았는데, 속이 울렁거려 한 입도 먹을 수 없었죠."

그날 밤 9시쯤 김씨를 비롯한 시민들은 상무대로 옮겨졌다. 상무대 막사에 200여 명이 갇혔다.

좁은 막사에 200여 명이 있다 보니 숨 쉬는 것조차도 답답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깜빡 졸다가 줄이 틀어지면 군인들은 곡괭이 자루로 몽둥이질했다.

몽둥이질이 끝나면 취조받으러 끌려갔다.

"너 제대한 지 얼마나 됐다고. 너도 데모했냐?"
"전 데모 안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취조당할 때마다 "데모한 적 없다"고 일관되게 말했지만 군인들은 믿지 않았다.

김씨는 그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생리 현상'이라고 했다. 막사 가운데에는 소변 통 용도의 페인트 통 6개가 놓였다.

"오줌을 남들 앞에서 봐야 하고, 대변을 보려면 눈에다가 띠를 묶어요. 화, 화장, 화장실을 데리고 가서 안 보이는 상황에서 싸야 해요. 군인들이 '낄낄' 대는 소리가 들려요."

4일 뒤 군인들은 이들 중 몇몇을 골라 헌병대로 데리고 갔다. 데모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일관되게 답변한, 이른바 혐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헌병대에서 군인들은 '다시는 눈에 띄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면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김씨도 곧장 서명했다.

군인들은 김씨를 비롯해 50여 명을 무등 경기장 앞에 내려줬다. 무등 경기장에 내려 보니 빨간 페인트 스프레이로 버스에 '전두환, 노태우 물러가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전두환, 노태우가 누군지, 저는, 그때, 그때도 몰랐어요."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는 반실신 상태였다. 김씨를 찾기 위해 며칠간 시체 더미를 훑고 다녔다고 했다.

바깥에선 헬기와 가두방송 소리가 들려왔다. 김씨는 또다시 군인들에게 끌려갈까 무서워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5월의 마지막 날이 돼서야 밖에 나갔다. 금남로 거리는 깨끗했다. 이웃 주민들은 "광주 전체가 피바다였었다" "군인들이 물청소를 해서 깨끗하게 해놓은 것이다" "수백 명이 죽었다"고 김씨에게 생생하게 말해줬다.

군대 제대만 하면 곧장 사회인이 될 줄 알았지만, 취업은 쉽지 않았다.

"밤에, 밤에 잠을 자지 못했어요. 무서워서. 상무대에 끌려가 폭행당하는 꿈을 매일 꾸고... 거의 2~3년간 적응을 하지 못했죠."

1983년 외삼촌이 일자리를 소개해줬다. 외삼촌은 당시 범양제지라는 회사에서 경비 일을 하고 있었다.

김씨는 그곳에서 종이 만드는 일을 배웠다. 술을 마시고, 동료들과 어울리면 정신적 고통이 나아지는 듯했다.

6년간 일한 끝에 결혼에도 성공했다. 선을 보고 결혼하게 된 아내는 작은 키가 귀여운 여자였다. 전남 고흥 소록도에서 간호 일을 한다는 점에도 크게 끌렸다.

김씨는 그녀와 첫 만남에서 결혼하자고 청혼했다. 두 사람은 소록도의 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행복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삶은 순탄치 않았다.

1990년 어깨와 허리 등이 급격하게 아파왔다. 병원에 가보니 몸 쓰는 공장 일을 오래 한 데다 5·18 때 폭행당한 후유증이 나이가 들면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저, 저는 일을 굉장히 잘했어요. 무슨 일을 맡겨놔도 척척했는데. 아파서 일하는 게 힘들어서 그만뒀어요."

제지회사 일을 그만두고 집에만 있게 됐다. 가장으로서 돈을 벌지 못하니 자존심이 상하고 우울감이 크게 늘었다.

1991년 정부에서 5·18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 김씨는 장애 8급으로 분류돼 1억원을 받았다. 그 돈을 전부 투자해 아내에게 화장품 가게를 열어줬다.

몇 년 뒤 IMF가 왔다. 1998년 아내의 가게는 문을 닫았다. 두 사람 모두 돈벌이가 사라졌다. 아내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소방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취직했다. 김씨는 또 혼자 집에 남았다.

"몸은 더 안 좋아지고, 설 곳이 없었어요. 나만, 나만 뒤처지는 느낌. 도저히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잠들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밤마다 뒤척였다. 벽을 보고 혼자 이야기하거나, 이유 모를 두려움에 자주 울었다.

아내는 치료를 받아보자며 김씨를 운암동 한빛신경정신과에 데려갔다. 그때부터 김씨의 기나긴 정신병원 생활이 시작됐다.

"병, 병원 생활은 단순해요.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약만 먹으면 되는데, 아침에 댓 개, 점심때 여섯 개, 저녁때 댓 개. 하루에 먹는 약만 한 주먹 정도였어요. 나이가 들어선 합병증으로 당뇨도 생겼고…."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못 잤다. 약을 먹어야만 두려움이 덜해졌고 불안함이 사라졌다. 그러나 점점 몸에 힘이 없어지고 눈이 퀭해졌다. 생각하는 법도 까먹어 버렸다.

보호사 선생님들은 친절했지만, 병원 생활이 20년을 넘어가다 보니 감시받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행히 불안감이 줄어들었다는 검사 결과를 받고 김씨는 지난달 3일 퇴원했다고 했다.

김씨가 고개를 떨궜다.

"퇴원만 하고 나면 나을 줄 알았는데…. 집에 오니 여, 여전히 다시 죄인인 것 같아요. 갈 데가 없어요."

퀭한 눈에 물방울이 맺히는가 싶더니 김씨는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정신적 손해배상이 필요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게 나의, 나의 40년을 책임져요? 난 삶이 사라졌어요. 정신병원에서 보낸 세월만 20 몇 년인데, 돈을 받는다 한들요…. 내가 5·18을 안 만났으면 돈, 돈도 벌고. 가족들도 먹여 살렸을 텐데. 이 나이 먹도록 놀고 애들한테 보탬도 못 주고."

한참 눈물을 흘리던 그는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 말을 이어갔다.


"애 엄마 빚을 갚아주고 싶어요. 애 엄마가 아파트를 융자 받아 샀다는데 아직도 갚을 게 많아서요. 그거를, 그거를 가족들을 위해 쓰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카메라와 노트북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김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잠, 잠시만요"하고 취재진을 멈춰 세웠다.


취재진이 들고 온 카메라를 한번만 보여달라고 했다.

"아내가 화장품 가게를 할 때 이런 취미라도 가져보자 해서 니콘 카메라를 샀었어요. 당시 60만원 주고. 딸 사진을 찍어주고 싶었는데 애가 사춘기라고 못 찍게 하더라고요. 나중에는 병원 치료하느라 금남로 지하상가에 카메라를 팔았어요. 카메라를 살래요, 우리 가족 사진을 내가 찍을래요. 내 소원은 그거예요."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