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한계 부딪힌 감정노동자, 어디로①] '익명 뒤 숨은 폭언' 콜센터 상담사의 시름

뉴스1

입력 2022.09.09 06:01

수정 2022.09.09 06:01

경기도 화성시 동탄출장소 코로나19 행정안내센터의 콜센터 상담사들이 민원 전화를 받는 모습.(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뉴스1 ⓒ News1
경기도 화성시 동탄출장소 코로나19 행정안내센터의 콜센터 상담사들이 민원 전화를 받는 모습.(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뉴스1 ⓒ News1


[편집자주]일터에 나가면 제 감정을 숨겨야만 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이들은 '감정노동자'라고 불린다. 손님이 욕설을 내뱉을 때도 화를 삭히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이들은 더이상 기댈 곳이 없다. '감정노동자 보호법' 이후에도 이들은 폭행·폭언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다. 뉴스1은 콜센터 상담사, 지하철 역무원을 중심으로 감정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보호대책의 한계점을 살펴봤다.



(부산=뉴스1) 노경민 기자 = "우리들끼리 흔히 이런 말을 해요. '욕받이', '쓰레받기'."

부산에서 일하는 콜센터 상담사 A씨는 오늘도 출근길이 두렵다. 상담 업무를 한 지 어언 10년째지만 진상 고객들의 갑질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A씨는 취재진에게 인터뷰 답안지를 건네며 "어젯밤에 이거 쓰느라 예전 생각에 갑자기 울화통이 치밀었다.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고 한숨을 쉬었다.

콜센터 상담사는 감정노동자의 대표 직종으로 불린다. 상담사와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고객들은 익명 뒤에 숨어 절제되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쏟아내는 경우가 많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 의뢰해 콜센터 상담사 199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콜센터 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상담사들이 고객으로부터 당하는 폭언·성희롱 피해는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08년 때 조사와 이번 조사를 비교하면 월평균 폭언 사례는 7.16회에서 11.58회로 약 62% 증가했고, 성희롱 사례는 0.96회에서 1.09회로 약 14% 증가했다.

고충은 날로 늘어나는데 피해를 호소할 방법은 부족하다. A씨는 "한창 일할 때는 동료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잠시 크게 한숨을 들이켜는 것 말고는 해결책이 없다"며 "실제로 욕을 들으면 머릿속이 하얘지고 손은 벌벌 떨려 어떻게 할지 멘붕이 올 때가 많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화풀이 대상을 찾기 위해 의도적으로 콜센터에 전화를 거는 경우도 적지 않다.

회사의 감정노동 보호 조치가 강화됐다는 평가도 상담사 4명 중 1명에 불과했다. 보호 조치가 강화되지 않았다고 응답한 상담사는 37.5%에 달해 부정적인 평가가 더 컸다.

2019년 고용노동부의 '고객응대근로자 건강보호 가이드라인'에는 콜센터 대응 절차를 '폭언→자제 요청→녹음 및 법률 위반 고지→통화 종료' 규정하고 있다.

피해 발생 즉시 통화를 끊을 수 없고, 최소 3번의 경고가 있어야만 종료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도 상담실장의 허가가 나야만 'ARS버튼'을 누르고 통화 종료할 수 있다.(회사마다 차이가 있음)

공공기관과 민간 기업의 '고객응대 업무 매뉴얼'에 따르면 욕설이나 성희롱을 들어도 통화 종료까지 최소 3단계에서 최대 7단계까지 안내 절차를 거치는 곳도 있다.

노동부의 가이드라인도 상담사의 고충을 덜어주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보통 고객들이 욕설을 시작하면 평정심을 잃은 상태이기 때문에 경고 조치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법적 강제력이 없는 점도 실효성에 의문 부호가 달린다.

이에도 회사 내부에 고충처리절차가 수립되지 않은 사업장은 40%에 달했다. 사업장 절반가량은 절차가 있어도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상담사들은 노동부 매뉴얼이나 산안법 개정안에 대해 1~2차례 간단한 회사의 공지만 받을 뿐 매뉴얼을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은 없다고 호소한다.

상담원 B씨는 "상담실장도 매뉴얼을 모르는 경우도 더러 있더라"며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 때 제휴병원이 있는지 물었더니 '확인해보겠다'는 말뿐이었다"고 말했다.

신입 직원들도 콜센터에 입사하면 상담 업무의 실태를 느끼고 금방 퇴사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한다.

2018년 '감정노동자 보호법'으로 불리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만들어진 계기로 통화 전에 폭언 금지를 알리는 음성 안내가 송출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폭언하지 않고 상담사에게 괴롭힘, 비꼬기, 통화 지연 등 법망을 교묘하게 피하는 고객들도 있다. 하지만 현재 폭언.성희롱 외에는 법적으로 조치할 방법은 없는 실정이다.

B씨는 "앞으로도 계속 폭언에 노출될 위험이 크다면 언제든지 퇴사를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성희롱이 발생할 시 '원 스트라이크 아웃제'를 도입한 서울시 120다산콜센터에서는 악성 민원인이 크게 감소한 효과를 보였다.


이 콜센터는 2014년 2월 민원인으로부터 성희롱이 발생할 시 즉시 통화 종료와 함께 법적 조치할 수 있는 내용의 '악성민원 대응강화계획'을 수립했다.

콜센터에 따르면 하루 평균 악성 민원 건수는 2014년부터 2020년까지 31→2.3→2→1→1.9→2.3→2.3건으로 감소세를 보였다.


서울시 120다산콜센터 관계자는 "대응을 강화하면서 상담사에게 폭언 시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인식이 부여된 효과가 있었다"며 "다른 기관에서도 벤치마킹하러 문의가 많이 오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