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최서윤 기자 = 올해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오는 11일 개전 200일을 맞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사흘 만에 수도 키이우를 접수하려던 계획이 무위로 돌아간 뒤, 3월 말부터 동남부 지역 점령에 혈안이 돼 있다.
그러나 6개월째 지지부진한 동남부 전황은 명실상부 세계 두 번째 군사대국 러시아와, 필사 저항 정신으로 서방의 확고한 지지를 얻어낸 우크라이나 간 대결이 더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푸틴이 돈바스 너머 노리는 건 제국 시절 영토 복원
9일(현지시간)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4월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북동부 하르키우 △동부 돈바스 도네츠크·루한스크 △남부 자포리자·헤르손·미콜라이우 등지에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
한국국방연구원의 '2022년 전반기 러시아 전략동향 분석: 우크라이나 사태 평가 및 전망'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동남부 점령을 시도 중인 러시아군의 특별군사작전은 '노보 러시아(Novorossiya·New Russia)' 점령을 위한 장기전 수순으로 나아가고 있다.
노보 러시아(노보로씨야)는 18세기 러시아제국에 통합된 땅을 칭해 붙여진 이름이다. 1774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말기 오스만제국에서 러시아제국으로 넘어갔다. 당시 러시아제국 황후 예카테리나 2세는 현 우크라이나 지역에 남아 있던 크림 칸국을 멸망시키고 노보 러시아 일대에 직할 통치령을 설치했다.
노보 러시아의 지정학적 공간이 바로 현재 격전지다. 우크라이나 돈바스, 자포리자, 헤르손, 오데사 등 동남부 전역과 2014년 불법으로 러시아에 귀속된 크림반도는 물론, 확전 시 최유력 격전지로 거론되는 몰도바 분리주의 지역 트란스니스트리아, 러시아 크라스노다르 등 흑해 일대가 전부 묶인다.
푸틴 대통령은 2014년 크림 병합을 계기로 옛 제국 영토인 노보 러시아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 동남부 일대가 짧은 역사의 한때 러시아제국에 묶였다는 사실이 크림 불법 병합과 이번 특별군사작전(침공), 훗날 이뤄질 수 있는 몰도바 트란스니스트리아 공격을 한큐에 정당화하는 논리인 셈이다.
푸틴 대통령에게 이런 열망을 심어주고 더 이상 제국도, 소련도, 세계 양강(兩強)도 아닌 러시아에 노보로씨야의 추억을 소생시킨 인물이 바로 극우 사상가 알렉산드르 두긴(60)이다. 그가 지난 8월 20일 자신을 노린 것으로 추정되는 차량 폭발로 딸을 잃은 건 우연이기 어렵다.
◇우크라 거센 반격…주민투표 불발될까
우크라이나가 동남부 영토 수복 작전을 본격화한 건 6월 23일 미국의 하이마스(HIMARS·고기동 대구경 다연장 로켓시스템) 로켓포 도착에 이어 서방 중화기를 속속 전달받은 직후로 추정된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5월 25일 NHK 인터뷰 등을 통해 "영토를 2월 24일 이전 상태로 탈환하지 않는 한 러시아와의 휴전협상은 어렵다"고 공언할 때만 해도, 이 포부에 걸린 기대는 높지 않았다.
같은 달 23일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는 현대 최고 '외교 전략가'로 꼽히는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입에서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현실을 인식하고 영토 일부를 내주더라도 러시아와 평화협정을 맺을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까지 나왔다.
그로부터 두 달여 후인 지난 8월 9일 크림반도 서부에 있는 러시아 공군 기지 사키 비행장에서 12번의 폭발로 1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하는 '의문의 사고'가 발생했다. 일주일 뒤인 8월 16일에는 크림 북부 러군 탄약이 폭발했다.
이것이 우크라이나의 '공격'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건 이달 7일이다. 그간 전황과 관련 침묵해온 발레리 잘루즈니 우크라군 총사령관은 국영통신 우크르인폼 게재 기고문을 통해 크림 공격 사실을 인정하고, "러시아군의 무게 중심을 이동시키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공격받은 크림반도 내 공군 기지와 탄약고 위치는 그간 우크라이나의 사정권 밖으로 여겨지던 곳이다. 우크라이나가 전선에서 최소 200㎞ 떨어진 사키 비행장을 타격할 만큼 충분한 사거리를 가진 무기 체계를 보유하고 있는지는 공개적으로 알려진 적이 없었다.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결실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러측 발표로 확인됐다. 지난 5일 러측 헤르손 행정 당국자는 시 인근에서 우크라군 포격이 이어져 차량 통행이 어려운 애로를 밝히며, 이달 11일 실시를 목표로 준비해온 주민투표 계획을 안보 상황으로 중단한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이달 11일 지방선거 투표와 함께 헤르손, 자포리자, 돈바스 등 점령지 주민들에게 러시아 병합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할 예정해왔다.
집권 통합러시아당은 이들 지역의 러 연방 가입 결정 여부를 가릴 국민투표를 11월 4일 '민족화합의 날' 열자고 제안한 상황이다.
◇러, 11월까지 영토 병합 추진…우크라, 내년까지 장기전
미 전쟁연구소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군은 현재 북동부 하르키우주(州) 하르키우시(市)부터 이지움시로 이어지는 전선에서 우위를 지키고 있다. 이지움은 러시아군이 루한스크 점령과정에서 군사 우위를 다지는 데 주효했던 전략 점령지다. 우크라군은 이제 이지움 북부 러시아 방어 진지를 진격하는 등 위협을 가하고 있다.
필사의 저항 의지와 서방의 지원 무기를 갖춘 우크라이나 측 반격이 진전을 보고 있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영토 탈환이 머지않은 듯한 발언으로 군과 국민 사기를 북돋고 있다.
그러나 그간의 침묵을 깨고 공개 기고문을 낸 잘루즈니 우크라군 총사령관은 냉정한 전황 분석에 기초, 돈바스 주요 전선인 도네츠크 바흐무트와 하르키우 이지움 전세가 '매우 불리한' 입장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그는 "전쟁의 기간은 이미 수개월로 측정됐고, 이 기간이 2022년을 넘어 확장될 것이라고 믿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도 설명했다.
그러면서 "2023년에도 우크라이나 저항의 물질적 기반은 파트너 국가들로부터 받는 상당량의 군사 원조일 것"이라며 "전략 상황의 중대 변화를 위한 유일한 길은 단연코 우크라군이 연속적 또는 동시적으로 반격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정거리가 더 길고 보다 강력한 서방의 무기 지원 지속을 촉구한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항전 의지 못지않게 푸틴 대통령 역시 쉽사리 물러설 의지가 없어 보인다. 그는 지난 7일 블라디보스토크 개최 동방경제포럼 연설에서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우크라이나에서 군사행동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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