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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상의 기억만은 또렷… 그렇게 가슴에 남은 한국은 두번째 고향이 됐습니다" [북유럽 리포트]

스웨덴 6·25 참전용사 인터뷰
종군 간호사 출신 유타 안데르손씨
간호학생 시절 부산 스웨덴 야전병원서 복무
중립국 운영 병원으로 북한 등 적군 치료 제공
쉴새없이 몰려든 부상병에 기숙사 공간도 부족
낙동강전투 치열했던 1950년 8·9월 기억 남아
"참상의 기억만은 또렷… 그렇게 가슴에 남은 한국은 두번째 고향이 됐습니다" [북유럽 리포트]

【파이낸셜뉴스 스톡홀름(스웨덴)=박소현 기자】 1950년 7월 어느 날. 22세의 유타 안데르손씨(사진)는 우연히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스웨덴 적십자가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에 자원할 의사, 간호사를 구하는 방송이었다. 중립국인 스웨덴은 군인을 파병했던 다른 나라와 다르게 의료인력 총 1146명을 한국으로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부모님과 함께 발트 3국의 라트비아에서 스웨덴으로 이민온 지 2년, 유타씨는 간호학을 공부 중인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 방송을 들은 유타씨는 스웨덴에서 약 7300㎞ 떨어진 한국의 전쟁터로 '모험'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유타씨는 첫 선발대인 178명의 동료와 함께 스톡홀름에서 비행기로 뉴욕으로 날아갔다. 뉴욕 인근의 미군 캠프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의 미군 캠프에 모인 뒤에 배를 타고 12일 동안 태평양을 건너 일본 요코하마로 간 유타씨는 1950년 9월 23일 스웨덴을 떠난 지 약 한달 만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미군을 제외하면 최초의 해외 의료지원단이었다.

올해 94세인 유타씨는 지난 23일 주스웨덴 한국대사관이 국가보훈처와 함께 스웨덴 야전병원의 부산 상륙일을 기념하는 행사를 마친 뒤 가진 파이낸셜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두꺼운 노트를 펼쳤다. 첫 장에는 한국을 갈 때 탔던 비행기와 배 티켓, 뒤로는 야전병원에서 일했을 당시 찍었던 사진, 유타씨 부모님이 스크랩한 한국전쟁 관련 신문기사 등이 빼곡히 정리돼 있었다.

유타씨는 사진첩을 보면서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1950년 부산의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에서 일하던 그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유타씨 눈에 비친 전쟁 중의 부산의 첫 인상은 너무도 끔찍했다. "거리가 진짜 더러웠고 환경도 끔찍했고 무서웠어요. 거리 모든 곳이 다 난민 캠프로 꽉 차 있었어요."

당시 야전병원은 부산상업고등학교(현 개성고)에 지었다. 스웨덴 의료진은 강당을 고쳐 진료실, 처치실, 수술실, 연구실 등을 만들었고 임시천막을 세워 입원실로 썼다. "거긴 정말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병원을 지으면서 환자를 돌봐야 했어요. 빨리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임시천막을 지어서 그곳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했습니다."

이들이 도착하자마자 부상병이 몰려왔다. 1950년 8월과 9월은 낙동강 전투가 치열했던 만큼 부상병도 속출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에 야전병원은 전투 현장에서 40㎞ 떨어져 있었다"면서 "처음 몇 주는 쉴 시간이 아예 없었다"고 회상했다. 기숙사 공간도 부족해서 3명이 작은 방 하나를 겨우 나눠 썼다.

스웨덴 야전병원에서는 적군인 북한군과 중공군 치료도 맡았다. 스웨덴 야전병원 의료진이 주로 미군 캠프의 포로수용소로 가서 부상당한 북한군 포로를 인계받았다. 부산에는 미군 야전병원도 있었지만 미군은 북한군 치료를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중립국 스웨덴에서 운영하는 적십자병원인 만큼 이들은 북한군에게도 평등한 치료의 기회를 제공하길 원했다.

그래선지 유타씨가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도 바로 북한 병사들이었다. 그는 "아마도 폭탄을 맞아서 피부에 심한 화상을 입은 병사였다"면서 "그는 병원을 떠나지 않고 오래 머무르고 싶어 했다"고 기억했다.

유타씨는 한국전쟁 중 스웨덴으로 돌아와서 간호학 공부를 마쳤다. 하지만 스웨덴 야전병원의 적지 않은 의료진은 휴전 후에도 부산에 남아 본격적으로 부산 시민을 무료로 치료했다. 부산 시민에게 '서전병원'으로 더 유명한 부산스웨덴병원에서 치료한 환자는 약 200만명에 달한다. 1958년에는 덴마크, 노르웨이 정부와 함께 서울에 국립의료원을 설치해 10년간 공동 운영하며 선진 의료기술을 한국 의료진에게 전수해 한국 현대의학의 기초를 닦았다.

유타씨는 지난 2010년 부산을 60년 만에 다시 찾았다. 하지만 유타씨가 기억하던 부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도착했던 작은 부산항은 규모가 큰 현대식 항구로 바뀌어 있었고 작은 마을들은 빼곡한 아파트촌으로 변했다. 그는 "이름은 모르지만 정말 아름다운 언덕에 올라서서 부산을 내려보는데 정말 환상적이었다"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판문점이었다"고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유타씨와 같은 해외 참전용사와 그 가족을 초청하는 '평화 캠프'를 코로나19 팬데믹 전까지 열었다. 그는 "내 아이들이 대한민국 대통령과 같이 점심을 먹은 적도 있었는데 우리가 정말 중요하게 대접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한국 정부는 우리에게 정말 많이 감사를 표현했다"고 만족해했다.

유타씨에게 '한국전쟁의 목격자로 혹시 한국의 후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나는 항상 한국 소식에 관심을 갖고 여전히 보고 듣고 있다"면서 "한국은 나에게 두번째 고향"이라고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세상을 떠나서 문득 문득 외롭다고 했다. "50년 전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다들 떠났다"고 했다. 지난 2019년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북유럽 순방 중에 스톡홀름에서 한국전 참전기념 제막식을 열었을 당시 참전용사 10여명이 참석했고, 지난해에는 참전용사 동료 7명이 함께 했으나 올해는 유타씨 혼자였다.

gogosing@fnnews.com 박소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