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손성진 칼럼] 정치인과 말

손성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09.26 18:32

수정 2022.09.26 18:32

[손성진 칼럼] 정치인과 말
BBC 설문조사에서 윈스턴 처칠이 셰익스피어와 뉴턴을 제치고 영국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선정된 데는 언어 구사능력이 한몫했을 것이다. 마음을 사로잡는 연설과 위트 있는 말재주였다. 처칠은 위기도 유머로 넘겼다. 단상에서 넘어져 웃음세례를 받자 이렇게 말했다. "제가 넘어져 국민이 즐겁게 웃을 수 있다면 다시 한번 넘어지겠습니다!" 처칠의 말솜씨는 14번이나 출마한, 오랜 정치경력의 소산이었다.

정치의 출발점은 혀끝이다.
말에서 시작해 말로 끝나는 게 정치다. 말은 정치인으로서 생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 정치인을 키우는 것도 말이고, 죽이는 것도 말이다. 태생적 달변가도 있지만 말은 경험과 지식의 산물이다. 화술은 선천적이기도 하면서 후천적이기도 하다. 바른 정치인이 되려면 촌철살인의 언어 구사력도 있어야 하고, 말을 할 때와 장소를 가릴 줄도 알아야 한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미국에서 한 기자회견을 NHK를 통해 보았다. 정치경력이 30년이나 되고 방위성 장관과 외상을 역임한 기시다는 답변에 막힘이 없었다. 국내외 문제들을 전문가처럼 소상하게 설명했다. 원고 없이 침착한 어조로 답변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내각제인 일본은 정치와 행정이 한몸처럼 움직인다. 똑똑한 젊은 관료가 일찌감치 정계로 나가 정치경력을 쌓는다. 4~5선 의원, 대신과 장관을 거치면 전문성과 연륜을 겸비한 정치인 겸 행정가의 면모를 갖춘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속어 논란에 휘말렸다. 윤 대통령은 말솜씨가 뛰어난 사람은 아니다. 20여년의 검사 생활로 거친 말에 익숙해 있다. 문제가 된 비속어도 검사실에서나 썼던 말일 게다. 윤 대통령은 사실과 다른 보도라고 했지만, 비속어 사용은 빼도 박도 못할 사실이다. 설화(舌禍)라기보다 말의 실수, 부주의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쳤다. 노련한 정치인이라면 비공개 장소에서도 정제된 말을 쓴다. 더욱이 최고 지도자라면 혼잣말을 할 때도 주변을 경계해야 한다.

바른 소리를 하는 정치인은 씨가 말랐고, 듣는 이의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달변가도 없다. 말에 미숙하다 보니 막말 '노이즈 마케팅'으로 주목받으려 한다. 막말의 일상화는 우리 정치의 자화상이다. 막말을 또박또박 받아치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현실은 우스꽝스럽다. 저질 정치가 자초한 것이다. 윤 대통령을 욕할 자격도 없다.

말은 소통의 수단이다. 정치인의 언어능력은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스타 장관'은 국민과 원활하게 소통하는 장관이라는 뜻이다. 우리 정치인, 행정가들은 소통력이 떨어진다. 전문성 부족에 언변도 모자란다.

그나마 눈에 띄는 인물이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다. 국민 앞에 나서려고 하는 자세가 좋다. 지난 19일 '모빌리티 혁신' 발표에서도 마이크를 잡았다. 관료들은 편하고 국민들은 신뢰가 간다. 장관이 단상에 오르자 직원들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능력 있는 정치인이나 장관은 어느 상황에서도 자신이 넘친다. 원희룡이나 기시다처럼 차분하고 당당하게 국민 앞에 설 수 있다.
전문성에 말솜씨도 좋다면 금상첨화다. 그 전에 말은 아낄 줄 알아야 한다.
때로는 침묵과 절제가 다변보다 더 중요하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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