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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사설] 30여년 묵은 총수지정제, 차라리 폐지가 낫다

현실 안맞고 형평성도 위배
친족범위 줄여도 독소 남아
우태희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오른쪽 두 번째)이 28일 서울 중구 대한상의회관에서 열린 '제6회 공정경쟁포럼'에 참석해 인사말 하고 있다. /사진=대한상공회의소 제공
우태희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오른쪽 두 번째)이 28일 서울 중구 대한상의회관에서 열린 '제6회 공정경쟁포럼'에 참석해 인사말 하고 있다. /사진=대한상공회의소 제공
대한상공회의소가 28일 마련한 공정경쟁 포럼에서 총수지정제에 대한 전문가들 질타가 쏟아졌다. 박세환 서울시립대 교수는 "동일인(총수) 지정은 대기업집단 규제의 출발점이자 핵심인데도 지정, 이의 제기, 불복 절차 전부가 불명확하다"며 근본적 개선을 촉구했다. 박 교수는 처벌조항이 터무니없이 과하다는 지적도 했다. 이선희 성균관대 교수는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거대 기술 플랫폼에 한해 사전규제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있긴 하지만 그 대상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엄청난 규제를 동반하는 총수지정제 대상기업 숫자를 대폭 줄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공정거래법의 총수지정제(대기업집단 지정제)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언제까지고 외면할 순 없다고 본다. 자산 5조원 이상 기업의 대주주를 총수로 지정하고 갖은 규제를 가하는 것이 골자다. 총수는 친인척의 주식 현황, 계열사 간 거래, 특수관계인이 보유한 기업 등을 신고해야 한다. 일감 몰아주기 금지 등도 적용된다. 올해 해당 기업은 76개에 이른다.

자산이 10조원을 넘을 경우 강도는 더 세진다. 계열사 간 상호출자 및 신규 순환출자, 채무보증 금지 등 50개 넘는 규제가 새로 생긴다. 지키지 않으면 형사처벌까지 받는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제도다.

현실성, 형평성 면에서 허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웬만한 총수들은 특수관계인이 200명이 넘는다. 이 중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총수가 특수관계인 소유기업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는 2년 전 친촌이 운영하는 음식점 자료를 제출하지 않아 고발된 적도 있다. 경영은 제쳐놓고 특수관계인 파악에 매달려야 하느냐는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정부는 올들어 내국인 차별이라는 비판을 받아들여 외국인으로 총수 범위를 확대하려 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외국인과 외국 정부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던 탓이다. 허술한 제도의 단면을 보여준다.

총수지정제가 처음 만들어진 것이 1987년이다. 기업의 문어발식 사업확장을 막고, 소수에게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제도였다. 당시는 국가 주도 성장기라 특혜를 누린 기업들도 있었던 만큼 그 나름대로 의미 있는 제도였다고 본다. 하지만 지금은 네이버, 카카오 같은 혁신 벤처기업들이 스스로 성장해 우리 경제를 주도하는 시대다. 이들 기업은 정부 덕을 본 게 없다. 기존 대기업도 과거 총수 1인 체제 시절과 다른 의사결정 구조가 이미 자리를 잡았다. 30여년 전 독과점 시대 통했던 제도를 산업 급변기에 계속 고집하는 것은 기업의 발목만 잡는 일이다. 사익편취는 다른 법률로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


공정위는 친족범위를 혈족 6촌에서 4촌으로, 인척 4촌에서 3촌으로 축소하는 식으로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을 추진 중이다. 지금보단 낫겠지만 이걸로 턱도 없다. 무한경쟁 시대, 이제는 제도 폐지를 적극 검토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