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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세계경제 미끼로 '파워게임'...금융위기 다시 붙붙여

박종원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10.14 05:00

수정 2022.10.14 04:59

리즈 트러스 정부 vs 중앙은행 극한 대립
미국 채권시장도 영국발 위기에 위태로워
영국의 리즈 트러스 총리가 12일(현지시간) 수도 런던의 하원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영국의 리즈 트러스 총리가 12일(현지시간) 수도 런던의 하원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파이낸셜뉴스] 지난달 파격적인 돈풀기 전략으로 세계 금융시장을 혼란에 빠뜨렸던 영국의 리즈 트러스 정부가 감세안 일부 철회에도 불구하고 돈줄을 계속 풀면서 또다른 충격이 예상된다. 그나마 국채시장을 지탱했던 중앙은행은 더 이상 시장 개입이 어렵다고 선언했고 영국 금융시장의 혼란은 이미 미국으로 옮겨가고 있다.

지지기반 약한 새 총리, 경기 부양 '올인'

올해 영국 파운드화 가치 추이 /그래픽=정기현 기자
올해 영국 파운드화 가치 추이 /그래픽=정기현 기자

영국의 리즈 트러스 총리는 12일(현지시간) 하원 질의응답 시간에 "중기적으로 나랏빚을 줄일 것"이라며 동시에 "공공지출을 삭감하지 않고 대신 납세자의 돈을 잘 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공공지출 유지 약속에 대해 "반드시 지키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자신이 제시한 감세안이 경제 성장률을 높이고 물가 상승을 억제한다고 주장했다. 전날 영국 싱크탱크인 재정연구소(IFS)와 씨티은행은 영국 정부가 국가채무를 유지하거나 줄이려면 600억파운드(약 95조원) 규모 지출을 삭감하거나 세금을 올려야 한다고 발표했다.

지난달 6일에 취임한 트러스는 시작부터 지지기반이 취약했다. 그는 총리를 뽑는 보수당 경선에서 하원의원들이 참여하는 1차 투표 결과 리시 수낙 후보에게 밀려 2위를 차지했다. 그는 대대적인 감세 정책으로 지지율 반전에 나섰고 결국 당원 투표에서 57%의 지지를 받아 겨우 총리에 올랐다. 트러스 정부는 0%로 예상되는 영국의 내년 경제성장률을 2.5% 수준으로 올리기 위해 돈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지난달 23일 새 예산안을 공개했다. 트러스 정부는 예산안에서 소득세 최고세율을 45%에서 40%로 낮추는 등 2027년까지 450억파운드(약 71조원)를 감세한다고 밝혔다. 이는 약 반세기만에 최대 규모다. 트러스 정부는 동시에 향후 6개월 동안 600억파운드(약 95조원) 규모로 에너지 요금을 지원한다고 선언했다.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가뜩이나 빚이 많은 영국이 감세로 파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파운드 가치가 급락하고 국채 가격 역시 추락했다. 이에 트러스 정부는 지난 3일 최고세율을 인하하지 않겠다고 한발 물러섰지만 다른 감세안의 철회 여부는 언급하지 않았다. 트러스 정부는 이달 31일에 수정된 예산안과 이를 뒷받침하는 중기 재정계획 전망을 발표할 예정이다.

국채시장 지탱하던 중앙은행은 개입 중단

올해 영국 20년물 국재 유통금리 /그래픽=정기현 기자
올해 영국 20년물 국재 유통금리 /그래픽=정기현 기자

영국중앙은행(BOE)은 트러스 정부 출범 전부터 물가상승을 걱정해 꾸준히 금리를 올리며 시중에 돈을 흡수하고 있었다. 영국의 기준금리는 올해 1월 0.25% 수준에서 현재는 2.25%까지 올랐다. 이는 2008년 국제금융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BOE는 트러스 정부의 예산안으로 파운드와 국채 가치가 급락하자 곧장 시장에 개입했다. BOE는 지난달 28일부터 매일 50억파운드를 들여 영국 장기 국채를 사들이는 동시에 과거 금융 위기 시절 매입했던 국채들은 약 1개월 동안 팔지 않기로 결정했다. BOE는 11일부터 매입 규모를 100억파운드로 늘리면서도 14일까지만 매입한다고 선을 그었다.

BOE 관계자는 긴급 매입을 중단한 이유에 대해 시장에서 국채 거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국채를 매입하려고 해도 매물로 나온 국채가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시장은 BOE가 12일 성명에서 매입 종료를 재확인하자 혼란에 빠졌다. 이날 영국의 20년, 30년만기 국채 가격은 장중 한때 2002년 이후 최저가를 나타냈다. 쿼지 콰텡 영국 재무장관은 같은날 인터뷰에서 14일 이후 국채 시장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이는 BOE 총재가 소관할 문제"라고 말했다. 일부 외신들은 트러스 정부가 14일이 지난 뒤 혼란이 심해지면 앤드루 베일리 BOE 총재에게 책임을 씌우려한다고 추정했다.

이와 관련해 피에르 올리비에르 고린차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트러스 정부와 BOE의 반목을 우려했다. 그는 "자동차 앞쪽에 앉은 두 사람이 모두 핸들을 가지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려는 것과 같다"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기금 비상, 미국까지 위험

이번 사태로 가장 큰 위험해진 투자자는 연금기금을 비롯한 영국의 각종 연기금들이다. 베일리는 11일 연기금에게 유동성 확보를 주문하며 "이제 (국채 매입 종료까지) 사흘 남았다"고 경고했다.

사실 BOE가 국채 매입으로 시세 방어에 나선 이유는 연기금을 지키기 위해서다.

영국 연기금들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국채 가격이 상승세를 타면서 부채연계투자(LDI)로 알려진 파생상품 거래로 돈을 불렸다. 이들은 보유한 영국 국채를 담보로 더 많은 국채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레버리지 투자를 진행해 자산을 늘렸고 남은 자금을 고위험 자산에 투자했다.

그러나 연기금들은 최근 BOE의 금리 인상과 트러스 정부의 경기 부양책으로 담보로 삼았던 국채 가격이 급락하면서 추가 증거금 납부(마진콜) 위기에 처했다. BOE가 국채 매입을 통한 시세 방어로 급한 불은 껐지만 결국 연기금이 파산을 면하려면 여러 자산을 매각해 현금을 확보해야 한다.

12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현재 영국 연기금들은 BOE가 매입을 끝내기 전까지 가지고 있던 주식과 부동산, 대출채권담보부증권(CLO)을 빠르게 팔아 치우고 있다. WSJ는 CLO를 지적하며 영국 연기금의 대규모 CLO 매각이 미국의 채권시장을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CLO는 신용이 낮은 기업 등의 대출 채권을 묶어 이를 담보로 또다시 발행하는 자산유동화증권 중 하나다. 영국 연기금들은 최근 10년 동안 고수익을 노리고 CLO 투자를 확대했으며 영국 연기금의 운용자산 중 최대 5%가 CLO로 추정된다.
이달 첫째 주 미국 CLO의 하루 평균 거래량은 약 10억달러(약 1조4000억원)로 지난 1년 간 일평균보다 두 배 급증했다. 최근 3주일 동안 미 투자등급 CLO의 거래 규모는 약 130억달러(약 18조5000억원)로 이는 코로나19 사태 초기인 2020년 3~4월(약 150억달러) 이후 최대다.
WSJ는 CLO 가격이 2020년 5월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다며 영국 연기금들의 마진콜 위기가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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