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본 사람은 많지만 영화 속 시대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영화 한 편으로 중동의 현실을 파악하긴 어렵다. 로렌스를 중심으로 한 영웅 담론과 오리엔탈리즘은 한계가 분명하다. 후에 로렌스는 자신이 제국주의의 앞잡이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환멸에 빠진 로렌스는 훈장을 반납하고, 젊은 날의 치기를 후회했다. 대령 예편 후 군대를 들락날락하다 오토바이 사고로 47살 때 숨졌다.
37살 무함마드 빈 살만이 17일 서울에 온다. 이슬람 수니파의 종주국이자 석유 부국인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왕세자 겸 총리 신분이다. 그는 로렌스 이후 중동이 낳은 최고의 유명인사이다. 별명이 '미스터 에브리싱'인 그는 영화에서 로렌스로 분했던 피터 오툴 못지않은 출중한 외모에 추정 재산 2조달러에 이르는 '비공인' 세계 최대 부호이다.
숱한 이복형제들 중 존재감 없고, 과묵하며, 차가운 성격의 왕자에 불과했던 그는 2015년 최연소 국방장관에 오른 뒤 2017년 왕세자로 즉위하면서 개혁 성향의 독재자로 거듭났다. 승계 과정에서 뿌린 피 때문에 "무한한 자원을 가진 살인자이며, 감정이 없는 사이코패스"라는 악평을 얻었다. 2018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자말 카슈끄지 살해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빈 살만의 서울 행보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그가 결정권을 쥔 700조원짜리 도시 건설과 12조원짜리 원전사업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 5대 그룹 총수가 그와의 만남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찾아오면 얼마나 바쳐야 하는지 고민하지만 빈 살만에게선 얼마나 얻어낼지 궁리한다는 점이 다르다. 빈 살만은 할리우드 영화 '블랙팬서'에 나오는 미래 왕국 와칸다의 실현을 꿈꾼다. 그가 세우려는 네옴시티는 서울의 44배에 이르는 SF 공상영화 속 미래도시이다.
사우디 수도 리야드가 부산과 2030년 세계엑스포 유치를 두고 각축 중이란 점이 최대의 걸림돌이다. 항간에는 빈 살만이 엑스포 개최권 양보를 네옴시티 건설 참여의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설이 떠돈다. 엑스포 개최냐, 중동 특수냐, 두개 다냐가 문제다. 속을 알 길 없는 야심만만한 빈 살만이 '제2의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joo@fnnews.com 노주석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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