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세네갈, 카메룬, 부르키나파소, 코트디부아르, 토고, 베냉, 기니, 콩고, 마다가스카르….
아프리카에 있는 국가들이다. 이 나라들은 모두 제국주의 시대 프랑스의 식민지를 거쳤다. (모로코는 스페인과 프랑스가 분할 지배했다) 그 결과 프랑스어가 공식 언어다.
그중 모로코, 튀니지, 세네갈, 카메룬, 코트디부아르, 토고 등은 아프리카 축구 강국이다. 월드컵 본선에 자주 얼굴을 내민다.
튀니지는 이번 월드컵에서 프랑스, 덴마크, 호주와 D조에 편성되었다. 조별리그 3차전에서 튀니지는 프랑스와 맞붙어 1-0으로 이겼다. 16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튀니지 국민은 프랑스전 승리로 16강 진출 못지않게 감격했다. 월드컵 본선 무대를 포함한 A매치에서 사상 처음으로 프랑스를 꺾어서였다.
알려진 대로 튀니지는 1881년부터 1956년까지 75년간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았다. 독립 후에도 프랑스에서 태어난 튀니지계 프랑스인들은 설움과 차별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경기가 끝나고 잘랄 까디리 튀니지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적인 승리다. 16강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영광과 자부심을 가지고 물러간다."
튀니지 선수 26명 중 10명이 프랑스 태생이고, 6명이 프랑스전에 선발로 나섰다.
내가 프랑스 우승을 바란 이유
카타르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세계의 축구팬들은 저마다 우승팀을 점찍었다. 어떤 이는 메시의 아르헨티나를 선택했고, 또 어떤 이는 네이마르의 브라질을 점찍었다. 나는 처음부터 프랑스가 우승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디펜딩 챔피언 징크스'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이유는 딱 하나. 킬리안 음바페(Kylian Mbappe)가 월드컵 무대에서 질주하는 것을 오래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음바페라는 축구선수를 기억하게 된 것은 러시아 월드컵에서다. 그의 돌파력과 결정력에 매료되고 말았다. 많은 축구팬들이 그러할 것이다. 폭풍 질주라는 표현은 음바페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음바페가 파리에서 태어난 1998년. 그해 여름 프랑스는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아트 사커'를 앞세워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음바페는 운동선수 부모의 피를 물려받았다. 아버지는 카메룬 태생으로 축구 코치를 지냈고, 어머니는 알제리 출신으로 핸드볼 선수로 뛰었다. 어려서부터 운동에 재능을 보인 음바페의 어린 시절 우상은 지네딘 지단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였다.
음바페가 닮고 싶어 한 지네딘 지단(Zinedine Zidane). 공격형 미드필더로 프랑스의 1998년 월드컵 우승을 지휘한 남자. 지단은 마르세유에 태를 묻었지만 그의 부모는 알제리 출생.
그의 부모는 1953년 지중해에 면한 알제리 북부 아게몬(Aguemoune)에서 바다 건너 마르세유로 이주했다. 알제리 독립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이다. 지단은 아랍어로 '믿음을 키워라'는 뜻. 지네디 지단이 프랑스의 축구 영웅으로 떠오르면서 아게몬은 지단 부모의 고향으로 유명해졌다.
우연이지만 음바페 어머니와 지단의 부모는 뿌리가 같다. 알제리 북부의 광범위한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카빌리(Kabylie) 부족 출신. 카빌리 부족은 자신들의 고유 문자인 베르베르 어를 사용한다. 지단 부모의 고향인 아게몬은 카빌리 부족의 집단 거주 지역이다.
알제리 태생의 '모로코 폭격기'
"푸른 하늘이 우리들 위로 무너져내리고, 땅이 꺼져버린다 해도, 그대만 날 사랑한다면, 세상일은 나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요(…) 만일 당신이 그렇게 원하신다면 나는 조국도 버리고, 친구도 버리겠어요~"
그 유명한 '사랑의 찬가'의 가사다. 에디트 피아프가 노랫말을 쓰고 마게리트 모노가 곡을 붙여 1950년에 발표한 샹송. '사랑의 찬가'는 미들급 세계챔피언 마르셀 세르당(1916~1949)과의 비극적 사랑에서 태어난 노래다. 세르당이 아니었으면 '사랑의 찬가'도 없었다.
프랑스 미들급과 유럽 미들급 타이틀을 차지한 세르당은 1948년 미국에서 미들급 세계챔피언에 오른다. 그 무렵 피아프는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뉴욕에서 프랑스 최고의 샹송 가수와 미들급 세계챔피언은 사랑에 빠졌다. 3남매를 둔 유부남이라는 사실은 두 사람의 사랑을 막지 못했다.
1차 방어전에 실패한 세르당은 리턴매치를 갖기로 하고 파리에 캠프를 차리고 훈련에 들어갔다. 훈련을 시작한 직후 세르당은 돌연 캠프를 나와 뉴욕행 여객기를 탔다. '보고 싶다'는 피아프의 전화를 받고 나서다. 하지만 여객기는 중간 급유지인 아조레스 군도에 착륙하다가 추락해 승객 전원이 몰사한다. 피아프는 세르당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하면서 절망한다. 세르당을 그리면서 쓴 노랫말이 '사랑의 찬가'다.
세르당은 1916년 알제리 북부 '시디 벨 아베스'(Sidi Bel Abbes) 근처의 프랑스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스페인계인 '피에 누아'(Pied Noirs). 피에 누아는 유럽계 혈통인 알제리 사람을 뜻한다. '검은 발'이란 뜻의 피에 누아는 1959년까지 알제리 인구의 13%(140만명)를 차지했다.
세르당이 프로 복싱에 데뷔한 것은 열여덟 살 때인 1934년 모로코의 고대도시 마크나스에서였다. 이후 세르당은 47연승 가도를 달리며 '모로코의 폭격기'라는 별명을 얻는다. 주로 카사블랑카와 파리에서 시합을 하다가 유명해진 뒤로는 런던과 미국에서 원정을 가기도 했다. 통산 114전 111승(65KO)를 기록해 프랑스의 위대한 복서로 평가된다.
알베르 카뮈와 '피에 누아'
알제리 하면, 우리는 또 한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지난 2년간 세계를 얼어붙게 만든 코로나19가 그의 1947년 작 '페스트'를 소환했다. 보이지 않는 전염병과 사투를 벌이는 알제리의 작은 항구도시 오랑(Oran)이 배경이다.
카뮈는 1913년 알제리의 '피에 누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것도 유복자로. 아버지 없이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한 카뮈의 유일한 즐거움은 동네 공터에서 아이들과 하는 축구였다.
그는 축구를 할 때 언제나 골키퍼를 봤다. 골키퍼는 골대만 지키면 되니 뛰어다니지 않아도 된다. 운동화가 닳을 일이 없었다. 골키퍼를 하면 새 운동화를 사줄 형편이 안 되는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혼날 일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도 골키퍼를 했고, 알제리 대학에 들어가서도 축구부에 들어가 골키퍼를 봤다. 가난 때문에 맡게 된 포지션이었지만 카뮈는 자연스럽게 홀로 골대를 지키며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자전 소설 '최초의 인간'에서 주인공 소년이 고교 축구부의 정식 골키퍼가 되어 기뻐하는 장면이 나온다.
프랑스인에게 20세기 가장 난감한 사건이 알제리전쟁(1954~1962)이다. 식민지 알제리에서 일어난 전쟁은 프랑스 정부 입장에서는 명백한 반란이었다. 무력 진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군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이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이 전쟁은 프랑스 대도시에 불똥이 튀었고, 프랑스 사회가 알제리 문제를 두고 사분오열되었다.
지식인들이 알제리 사태를 놓고 논쟁을 벌였고, 그중 일부는 독립세력 편에서 싸우기도 했다. 알제리전쟁으로 프랑스가 와해되는 듯한 양상으로 번졌다. 결국 제4공화국이 무너졌고 드골이 다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 전쟁은 프랑스 사회에 커다란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 알제리의 피에 누아는 프랑스로 강제 이주를 당했고, 현재 프랑스에 320만명이 산다.
카뮈는 1940년대에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 합류한 유럽계 알제리인이다. 패션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철학자 자크 데리다·루이 알튀제, 작가 자크 아탈리, 역사학자 피에르 노라 등이 카뮈와 같은 피에 누아다. 카뮈는 알제리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알제리 없는 카뮈 문학은 상상할 수 없다. 또한 북아프리카는 카뮈 철학의 원천이었다.
프랑스 문화의 힘은 다양성과 똘레랑스(관용)다. 프랑스 축구 역시 인종적 다양성이 그 장점이다. 4강전에 선발로 나선 선수들의 뿌리를 보면 뎀벨레는 세네갈·말리, 쿤데는 베냉, 추아메니는 카메룬이다. 카타르 월드컵에서 음바페의 폭풍 질주를 보면서 많은 프랑스 소년들이 또 다른 꿈을 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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