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자 나자피 이란 외무부 법무·국제기구 담당 차관은 지난 18일(현지시간) 테헤란에서 윤강현 주이란 한국대사를 초치해 우리나라가 70억 달러(약 8조 6870억 원) 자금을 동결한 상황과 핵확산금지조약(NPT) 위배까지 언급하며 비판 수위를 높였다.
이에 조현동 외교부 1차관도 19일 사이드 바담치 샤베스타리 주한이란대사를 초치했다.
'초치'란 외교사절을 주재국 정부가 불러들여 입장을 전달하는 외교적 행위를 말한다. 우방국들 사이에도 이뤄지는 일이기는 하지만 외교사절을 초치하고 이를 대외에 알린다는 것은 통상 공개적 항의의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외교 채널을 통한 물밑 협의를 넘어 서로 초치하는 모양새까지 취했다는 것은 사실상 문제 상황을 대외에 드러낸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란은 윤 대통령의 이번 발언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이나 양국의 기존 현안인 원화 동결자금 문제 등까지 거론했다.
나자피 차관은 윤강현 대사 초치 당시 "한국이 이란의 금융자산을 차단하는 등 비우호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밝히고 "한국이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한국과의 관계를 재검토할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여기에 더해 "윤 대통령이 최근 핵무기 제조 가능성에 대해서도 거론했는데, 이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윤 대통령의 지난 13일 국방부 업무보고 발언 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윤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 수위가 높아질 경우 "대한민국이 전술핵을 배치한다든지 자체 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라고 발언했다.
외교부는 이란 측 주장에 대해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강하게 반박했는데 조 차관이 이란 대사를 초치한 데는 이란이 이번 사안과 무관한 NPT 문제까지 무리하게 거론했다는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NPT 의무 이행 문제, UAE 관련 발언 등에 대해 이란 대사를 초치해 명확히 우리 정부의 입장을 설명한 것"이라며 "NPT 관련 언급에 대해서도 이란 정부의 문제 제기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며 이란 측의 문제 제기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지적한다"라고 말했다.
외교가에선 이란 법무 담당 외무차관이 윤 대사를 초치한 것에 대해 "이란이 법률적 성격을 가진 동결자금 등 문제를 해결하고자 대사 초치를 이용한 의도도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중동의 대국'인 이란은 한때 한국의 중동 내 주요 교역상대국이자 1962년 수교 이래 오랫동안 우호협력 관계를 이어온 사이다. 그러나 최근 수년간 양국관계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70억 달러 상당으로 알려진 한국 내 이란의 동결자금 문제 때문이다.
이란은 2010년부터 IBK기업은행과 우리은행에 이란중앙은행 명의로 개설한 원화 계좌로 한국에 대한 석유 판매 대금을 받고 한국으로부터의 수입대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미국 트럼프 정부가 2018년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를 일방적으로 탈퇴하고 대이란 제재 복원의 일환으로 이란중앙은행을 제재 명단에 올리면서 이 계좌가 동결됐다.
미국의 경제 제재로 인해 발생한 한국의 동결 자금 70억 달러는 이란으로선 가장 큰 규모의 자금에 해당한다. 한국의 의지와 관계없이 미국의 제재로 묶인 자금이지만 이란은 한국에도 거센 압박을 가하며 동결자금 반환을 끈질기게 요구해왔다.
2021년 이란 혁명수비대가 호르무즈 해협의 오만 인근 해역에서 한국 국적 선박을 억류했다 풀어준 것도 동결자금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와 함께 이란의 '히잡 시위' 탄압이 국제적 문제로 떠오르면서 인권 문제도 양국의 갈등 요인이 됐다.
'가치외교'를 중시하는 윤석열 정부는 "강경한 시위 진압이 장기화하고 있는데 대해 우려를 갖고 있다"라는 입장을 밝히고 지난달 이란을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내 여성지위위원회(CSW)에서 제명하는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자 이란은 "비우호적 결정"이라고 반발했다.
이후 이란은 이태원 참사로 자국민 5명이 숨지자 "한국 정부가 관리 방법을 알았다면 행사 관리를 했어야 했다"며 내정간섭으로 보일 수 있는 발언까지 했다.
이란이 윤 대통령의 이번 발언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동결자금을 비롯한 기존 갈등 사안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도 있다.
이처럼 부담 요인이 이미 누적된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한·이란 관계의 민감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갈등을 악화할 수 있는 발언을 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2019년부터 UAE와 이란이 관계 정상화를 논의하고, 긴장 완화에 힘쓰고 있는 상황에서 제3국인 우리나라가 불필요한 개입을 했다는 지적도 피할 수 없게 됐다. 해당 발언이 사전에 준비된 것이 아닌 윤 대통령의 즉흥적 발언으로 보이는 데 대해 외교부 차원이 아닌 대통령실의 구체적 해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외교가에서는 한국 정부가 앞으로 외교적 소통을 통해 이번 갈등을 원만히 관리해 나갈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한국이 수입하는 원유의 70% 이상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수송된다는 점에서도 이란과의 안정적 관계는 중요하기 때문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한국과 이란의 관계가) 선박 피랍 이후와 비교해봐도 관리가 되는 상황"이라며 "관계 발전에 대한 정부 의지는 변함없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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