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최진숙 칼럼] 폴 마틴의 결심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03.13 18:09

수정 2023.03.13 18:09

[최진숙 칼럼] 폴 마틴의 결심
캐나다가 주요7개국(G7)에 낀 것은 1975년 자유당 집권 때다. 지금의 캐나다 총리 쥐스탱 트뤼도의 부친 피에르 트뤼도가 그 시절 총리였다. 이웃 미국의 주선으로 서방 클럽에 합류하긴 했으나 존재감 약한 나라는 기를 펴지 못했다. 당시 캐나다 경제는 글로벌 2% 비중밖에 안 됐다. 더욱이 1970~80년대 내내 재정적자에 시달렸다. 1990년대에 접어들자 한 해 예산의 3분의 1이 국채 이자로 나갔다.
서방 언론은 캐나다를 '제3세계 명예회원' 운운하며 모욕을 줬다.

역사학도 출신의 정치인 폴 마틴의 등장으로 캐나다 경제사는 한 획을 긋는다. 마틴은 전기·해운 회사를 다니다 정치에 입문한 뒤 1988년 나이 오십에 자유당 의원이 됐다. 1993년 총선에서 승리한 장 크레티앵 자유당 정부가 그를 재무장관으로 기용했다. 마틴이 장관 취임 후 집무실에서 제일 처음 봤던 서류가 파산한 보험회사 컨피더레이션 라이프 처리 관련 문서다. 험난한 앞날의 예고편이었다.

정부 지출을 과감히 줄이고 균형재정을 맞추는 것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됐다. 취임 이듬해 말 터진 멕시코 페소화 위기는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20% 이상 지출삭감 방침에 저항하는 부처의 사업은 전면 원점에서 재검토했다. 그 뒤 60% 삭감안을 들이대자 반발이 사그라들었다. 연금개선은 마틴이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었다. 캐나다국민연금(CPP)은 1966년 시작 직후부터 제도의 지속력에 의문이 달렸다. 이미 저출산 디스토피아 그림자가 드리운 상태였다. 그랬으면서도 30년 가까이 손을 댄 이가 없었다. 마틴에 와서야 비로소 개혁의 장이 섰다.

2015년이면 연금이 바닥 난다는 보고서는 그 무렵 나왔다. 마틴의 주도로 연방정부와 10개 주정부가 고통스러운 대화를 시작했다. 지난한 토론 끝에 보험료를 올리고 수급개시 연령을 늦추면서 향후에는 3년마다 연금의 지속가능성을 따져보기로 했다. 문제가 있다는 판단이 들면 괴로운 조정절차 대신 보험료, 분배율에 자동 공식을 적용하는 것으로 했다. 이 개혁안 합의까지 3년이 걸렸다.(세계경제연구원 '캐나다 국민연금 시스템의 성공과 CPPIB')

마틴의 승부수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결정적인 신의 한 수는 철저히 금융엘리트로 채운 연금투자위원회(CPPIB)다. '과도한 위험을 지지 않고 수익률을 극대화할 것'. 마틴이 법에다 못 박은 CPPIB의 의무조항이다. 마틴은 CPPIB가 이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조직을 정치인, 권력자, 비전문가로부터 분리시킨다.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그것을 증명해줘야 했다. 나는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책 '미래에 대한 준비(Fixing the future)'엔 이런 결심이 여러 번 나온다. CPPIB의 투자수익률이 세계 연기금 중 압도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이제 우리다. 가장 낙관적인 출산율을 기준으로 해도 2055년이면 연금이 텅텅 빈다. 제도개혁이 시급한데 아직도 정부와 정치권은 폭탄 돌리기다. 투자수익으로 고갈 시기라도 늦출 수 있다면 좋으련만 수익률은 사상 최악인 마이너스 8%대(2022년)다. 기금 운용조직은 정치 외풍에 매번 시달렸다.
지금 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마틴의 결심이 새삼 귀하게 여겨진다.
누군가 총대를 메야 한다.

jins@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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