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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백경사 사건' 21년만에 고개 드는 그날의 진실

뉴스1

입력 2023.03.20 05:30

수정 2023.03.20 08:58

전북경찰청은 청사 안에 '추모의 벽'을 만들고 2002년 9월 추석 명절 근무 중 괴한의 습격을 받고 순직한 백선기 경사(순직 후 경위로 추서)를 추모하고 있다./뉴스1 DB
전북경찰청은 청사 안에 '추모의 벽'을 만들고 2002년 9월 추석 명절 근무 중 괴한의 습격을 받고 순직한 백선기 경사(순직 후 경위로 추서)를 추모하고 있다./뉴스1 DB


전북경찰청 전경/뉴스1 DB ⓒ News1 이지선 기자
전북경찰청 전경/뉴스1 DB ⓒ News1 이지선 기자


(전주=뉴스1) 이지선 강교현 기자 = 지난 2002년 9월20일 밤 12시께 전북 전주시 금암동 금암2파출소. 추석 명절이 시작되던 새벽, 홀로 파출소를 지키던 파출소 부소장 백선기 경사가 흉기에 여러차례 찔려 살해됐다.

순찰을 나갔다 돌아온 동료 경찰관들이 피를 흘리며 숨져 있는 부소장을 발견했다. 살인범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자취를 감춘것은 범인뿐만이 아니었다.
그날 현장에서는 38구경 권총 1정과 실탄 4발, 공포탄 1발이 함께 사라졌다.

대대적인 수사에 나선 경찰은 당시 용의자 3명을 검거했다. 하지만 이들은 "고문과 가혹 행위로 인해 허위 자백했다"고 진술을 뒤집었고, 결국 풀려났다.

이렇게 사건은 미제로 남게 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희미해져갔다.

◇전북경찰청 미제사건팀으로 날아온 편지 한 통

20년 넘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이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난 건, 지난달 13일 '편지 한 통'이 경찰에 도착하면서다.

편지를 보낸 이는 '2001년 대전 국민은행 강도살인 사건'으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승만(52)이었다.

편지에는 "21년 전 전주에서 발생한 백 경사 살인사건에서 사라진 총기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경찰은 곧바로 이승만과의 1차 면담을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울산의 한 여관 천장에 총기를 숨겼다"고 진술했다.

구체적인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 경찰은 지난 3일 압수수색 영장을 들고 이승만이 말한 현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철거를 앞두고 있던 오래된 여관 천장에서 권총을 발견했다.

38구경 권총이었다. 총기번호는 ‘4280’. 21년 전 살인사건 현장에서 사라진 바로 그 총이 20년6개월만에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실마리를 찾은 전북경찰은 수사부장을 중심으로 형사과 강력계, 강력범죄수사대, 과학수사계, 장기미제팀 등 47명으로 구성된 전담수사팀을 꾸려 관련 수사에 본격 돌입했다.

◇이승만 "이정학이 범인이다" vs 이정학 "이승만이 범인이다"

편지를 보낸 이승만은 2001년 대전에서 발생한 국민은행 강도 살인 사건 이후 20년 넘게 숨어지내다 공범 이정학(51)과 함께 지난해 붙잡힌 인물이다.

대전 사건으로 이미 수감된 이승만은 지난달 전북 경찰에 "2002년 이정학이 전주에서 경찰관을 죽이고 권총을 가져와 숨겨달라고 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하지만 이정학은 오히려 "이승만이 경찰관을 죽이고 권총을 숨겨달라고 했다"고 상반되는 진술을 내놓으며 범행을 상대의 책임으로 미루고 있다. 이승만은 이정학의, 이정학은 이승만의 단독 범행을 각자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경찰은 현재까지 이승만과 이정학을 각각 4차례 만나 조사했다.

경찰은 "이들은 이미 대전 사건 때도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다"며 "충분히 예상했던 부분인만큼 진술의 진위와 실체 전모를 밝히기 위해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 맞춰지는 퍼즐…패턴이 발견됐다

이번 사건을 대하는 경찰의 태도는 어느때보다 더 진지하다. 다른 곳도 아닌 파출소에서 근무하다 숨진 선배 경찰의 한을 풀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어깨도 무겁다.

편지 도착 한 달여만에 용의자가 2명으로 압축된 지금 경찰의 판단은 유력을 넘어 확신에 가깝다.

이후신 전북경찰청 형사과장은 지난 16일 '전주 백 경사 피살 사건'과 관련해 "현재 조사 중인 피의자 2명이 범인이 아닐 확률은 없다고 본다"며 "모든 걸 종합해 봤을 때 적어도 둘 중에 한 명이 범인이라고 판단한다"고 확신했다.

이들이 그동안 저지른 범행을 나열해 분석한 경찰은 백 경사 피살사건이 또 다른 강도 행각을 위한 단계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승만과 이정학은 지난 2001년 10월 도보 순찰 중이던 경찰관을 차로 들이받은 뒤 총기를 탈취했고, 두달 뒤 탈취한 총기를 활용해 은행 강도 행각을 벌였다.

이후 2002년 9월 백 경사가 잔혹하게 살해된 뒤 총기를 빼앗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로부터 네달 뒤 이승만과 이정학은 2003년 1월 대전시 중구 한 쇼핑몰에 세워진 현금 수송 차량을 탈취해 달아났다.

총기를 빼앗은 뒤 강도 행각을 저지르는 일종의 같은 '패턴'이 확인된 것이다. 이 때문에 경찰은 현금 수송 차량 사건 이전 모의 과정이 어떠했는지 등에 대한 집중적인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 경찰이 이승만·이정학을 '용의자'로 보는 더 많은 이유

경찰은 사건 발생 당시 정황과 현재까지 수집된 직·간접적인 증거를 토대로 이승만과 이정학을 범인으로 보고 있다. 두 용의자의 진술과 달리 공동 범행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는 상태다.

전북 경찰 검시팀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백 경사의 신체 손상을 살펴볼 때 원한이나 보복보다는 강도 사건 등 특정한 목적성이 있는 살인 사건에서 보이는 상흔이 포착됐다. 이 점으로 미뤄 혐의도 애초 살인에서 강도살인으로 적용할 가능성이 있다.

또 숨진 백 경사에게서는 아주 소극적인 방어흔만이 발견됐다. 근무 중이던 경찰관이 필사적으로 막는 등 저항을 거의 못한 상태에서 흉기에 6번이나 찔렸다는 점에서, 이승만과 이정학의 공동 범행 가능성도 높은 상황이다.

이들이 불법 음반 테이프 판매를 하며 전주권역을 자주 오고 간 점 등 범행과 관련한 지리적 연관성도 충분하다고 경찰은 판단했다. 이밖에 경찰은 당시 현장을 목격한 참고인을 불러 법최면 수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매우 구체적인 사건 현장의 상황 진술이 나온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사건 현장에서는 갈매기모양 또는 빗살무늬로 보이는 발자국 2개가 발견된 바 있다.
경찰은 이 발자국들이 1명 또는 2명의 흔적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정밀 감식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두 용의자의 진술과 발자국, 목격자 진술, 분석 자료 분석 등 많은 부분들이 동시에 진행되며 수사에 속도감이 붙고 있다"며 해결에 자신감을 내비쳤다.


강황수 전북경찰청장도 "21년 전 현장에서 근무하던 경찰관이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고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유족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경찰관들도 애타는 동료 의식을 느끼고 있다"며 "성실하게 대비해서 이번 기회에 이 억울함은 꼭 풀어야 한다는 자세로 수사에 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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